루이지애나 미술관 입구를 지나자마자 무언가에 이끌리듯 오른쪽으로 향했다. 미술관 내부지도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고자 하는 건물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를 처음 맞아준 풍경은 통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아늑한 의자가 놓여있는 리빙룸 같은 곳이었다.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이 원래 미술관 부지에 있었던 알렉산더 브런의 저택 이름이었다는데, 순간 미술관이 아닌 누군가의 저택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화살 표시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쿠사마 야요이의 Gleaming Lights of the Soul 이란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다른 관람객들의 첫 공략 장소는 이곳이 아니었는지 건물에는 3명의 외국인 가족과 나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서있다가 그들이 작품 감상을 끝내고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들어갔다. 사람이 없었던 덕에 그녀의설치예술품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방안의 천장과 벽이 모두 거울로 덮여있어 그 어느 곳을 쳐다봐도 내가 서 있는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공간.
그곳에서 나는 혼자임이 분명했지만, 사방의 거울들이 서로를 비추다 보니 순식간에 여러 명의 내가 서있게 되었다. 평소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직접 볼 수 없다. 거울에 비치거나 사진으로 찍히는 모습으로 나 자신을 확인할 뿐이다. 그 때문인지 동서남북으로 적나라하게 확인되는 나라는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었지 하며 거울 안에서 끊임없이 쪼개지는 나를 응시한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수십 개의 분열된 자아가 거울을 통해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거라곤 호박이 전부였는데, 덴마크 여행 중에 그녀의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현실과 전혀 다른 차원의 방에서 빠져나와 95세 예술가의 우주론을 읽는다. 쿠사마 야요이는 달도 물방울이고, 해도 물방울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물방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물방울에 대한 애착이 그녀가 앓고 있는 정신공황과 강박증의 결과라고만 생각했는데, 물방울은 그녀가 이 세계와 우주를 인식하는 방법이자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 그 자체였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접하고 나서 그녀 삶에도 관심이 생겨 그녀에 관한 책과 자료들을 찾아봤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환영과 환각에 시달렸고, 부모로 인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했다. 오랜 세월 동안 불안한 정신 상태를 가졌던 그녀는 끝내 정신병원에 거주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행보는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한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과 정확히 합치된다.
예술을 잘 모르는 내가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어렵지만, 트라우마와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의 이야기에 반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이유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데 유독 눈이 가는 예술품을 빚어낸 예술가들을 쫓다 보면 지극히 사적인 고난과 역경에 맞서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만들어낸 작품이란 결과물은 그걸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만날 장애물에 맞설 힘을 준다.
예술가가 작업을 하면서 쏟아내고 기울였을 그 숭고한 기운은 그냥 느껴지는 것이다.
잘 모르더라도 자꾸만 시간을 내서 예술 작품을 가까이하려는 것도 그런 에너지를 몸소 느끼고 싶어서인 것 같다.
그녀의 관한 책(엘리사 마첼라리 저, 쿠사마 야요이 강박과 사랑 그리고 예술)을 덮으며 표시한 페이지들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1957년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들고 간 것은 기모노 60벌, 판매할 그림과 스케치 2천여 점, 1백만 엔 정도의 달러. 그리고 그렇게 떠난 뉴욕에서 그녀는 24시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