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겨울, 칭다오에 여행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는데 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우리 둘의 표정이었다. 당시의 여행은 승진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은 입사 10년 차 만년 대리들의 즉흥적인 도피였는데 둘 다 찐으로 웃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찍은 것이라는 걸 감안해도 5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둘 다 승진을 했고 이제는 사실상 승진에 개의치 않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없을까 하는 의구심과 서러움이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는데, 표정도 늙는다는 것이었다.
탱탱함의 소실과 중력에 대한 저항력 감소로 발현된 눈과 턱의 처짐, 슬슬 신경 거슬리게 하는 팔자 주름의 파임. 얼굴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으니 표정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신체 노화받고 더블로 잃은 카드패에는 '해맑음'이라는 젊음의 우대권도 있었다.
40여 년의 시간 동안 맞닥뜨린 크고 작은장애물들은 해맑음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학습효과도 있었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고 해맑음이 사라진 빈 공간에 경험과 연륜으로 쌓인 성숙 비슷 무리한 게 있긴 하다. 그럼에도 5년 전보다 늙은 오늘의 표정에 서글퍼졌다.
회사 동료가 보낸 과거의 사진 한 장 때문에 최근에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한껏 웃었다 생각하고 찍었던 것 같은데, 내가 발견한 건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어색한 얼굴과,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우는 듯한 조커뿐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고 내게 책임이란 것은 중요한 가치지만, 되도록이면 철없음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었던 나의 철없던 바람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다.
얼굴과 표정에서 해맑음이 영영 달아나기 전에 앞으로 나의 흑역사(!)를 더 많이 기록하고, 내일보다 좀 더 많을 오늘의 해맑음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가짐과 행동가짐에 힘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