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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산다, 그리고 반려 TV

by 앤디


이사 준비를 하면서 1인 생활에 꼭 필요한 가전제품만 구입하려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세탁기, 냉장고, 공기청정기 등 거침없이 써 내려가다 유독 망설여지는 품목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TV였다. 그 이유는 내가 텔레비전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든 후든 어릴 때부터 TV는 내게 최고의 미디어였다. 아직도 천사들의 합창 마리아 호아키나의 흰 장갑을 기억하고, 국민학교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짜파게티를 먹으며 레니게이드를 봤던 행복감이 생생하다. 학창 시절을 지나 회사원이 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어 퇴근하고 집에 오는 날이면 바로 TV를 켜기 시작해 잠들 때까지 끄지 못했다. TV를 덜 좋아했더라면, 출신학교와 직업이 지금과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세상 널브러진 자세로 생각 없이 TV를 보다 이불을 덮을 때쯤엔 퇴근하고 뭘 좀 해야 하는데 하는 조바심과 불안함이 반복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생활공간이 바뀌는 독립 이후엔 TV앞 소파 대신 책상 위에 바로 앉아 글을 읽기로 계획했다. TV를 대하는 나의 습성은 이 찬란한 계획을 작심 3초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TV구입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 끝에 결국 TV를 사긴 샀다. 안 그래도 1인 가구인데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려면 TV뉴스 정도는 챙겨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가 핑계에 스스로 설득되었다. 다만, 작은 화면으로 영상 보는 걸 싫어하는 개인적 취향을 고려하여 부러 이동형 스탠드 TV를 구입했다. 확실히 화면이 작으니 텔레비전 보는 맛이 떨어지긴 한다.


어제는 오랜만에 TV를 끄고 읽다만 책을 읽었다. 독립 3개월 차, 중간 통계를 내자면 TV 보는 시간 아니 TV를 켜고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진 않았다. 독립해서 살아보니 혼자만의 삶에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적막이었다. (층간소음과 외부소음이 없다면) 집에서 소리를 낼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점점 이 적막에 적응이 되고 고요함을 잘 활용하면 그토록 바라던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소리 진공 상태에 적절한 균열을 내주는 나의 반려 TV, 안 사고 이사 왔으면 어쨌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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