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으로부터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집안의 첫 번째 아가가 언제 이렇게 커서 이성친구 얘기를 할까 귀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엄마는 조카가 고모보다 낫다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셨다.
주말 저녁 둘째 조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둘째 조카도 같은 유치원에서 좋아지내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생일 선물을 뭘 받았냐고 물어보니 치마를 받았다고 했다. 첫째 조카가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모, 유리 내일 그 남자애 집에 놀러 가서 결혼하기로 했어."라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기가 차다는 듯 손녀들이 딸보다 낫다고 또 한 번 나를 째려보셨다.
가족들과의 식사를 마치고 생일 선물을 사러 조카들과 쇼핑몰로 향했다.
첫째 조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물었다.
"리사, 남자친구 뭐가 좋아?"
1초도 안 돼서 답이 나왔다.
"다."
"다? 그래... 맞네. 좋아하면 다 좋지."
아이들의 본질을 꿰뚫는 투명한 대답은 정말이지 듣기가 좋다. 어른 지인이 이런 대답을 했다면 비위 상한다는 식의 핀잔을 날리고 나서 속으로 외모, 재력, 직업, 성격이 전반적으로 평균 이상이란 거군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조카의 대답에 나는 또 궁금해졌다. 나이가 한 자릿수인 애가 남자친구라고 할 때는 그냥 친구들과는 대체 뭐가 다르기에 그렇게 칭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조카의 대답은 이번에도 명쾌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더 친해."
아이는 또 핵심을 찔렀다.
"아 그럼 이야기도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놀겠네?" "응."
"지금 방학인데 보고 싶진 않아?"
"괜찮아. 곧 개학이니까. 그리고 고모, 방학식 때 비 왔는데 그날 같이 놀이터에서 비 맞고 뛰어놀았어."
연식에 걸맞게 영화 클래식의 조인성 손예진을 떠올리다가, 조카의 낭만적인 방학식 데이트에 주책스럽게 마음이 간질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또래의 커플을 보고 부러운 적은 없다시피 했는데, 8세 연애(?)에 이렇게 감정선이 몽글 해질 일인가 참 이상했다.
다 같이 둘째 조카의 선물을 고르고 조카들이 좋아하는 막대 사탕을 사주러 캔디 가게에 들렀다. 알록달록 비비드 한 컬러감의 막대 사탕들이 벽 한가득 걸려있었다. 조카들에게 먹고 싶은 거 하나씩 고르라고 말하면서 내일 결혼(!)하는 둘째 조카에게는 남자친구 것도 고르라고 했다. 둘째 조카가 수많은 막대 사탕들 중 핑크빛 하트 사탕 두 개를 거침없이 집어 들었다. 아이고 아가, 6살 너의 세상은 그저 하트 뿅뿅으로 가득 찼구나 하며 웃다가 조카들의 사랑 타령에 여러 번 얻어맞은 42살 고모는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요즘 유난히 더 회사ㅡ집ㅡ회사 굴레에다가 온갖 종류의 로맨스와 저만치 멀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8살 6살 조카들 덕분에 42살 고모는 새삼 깨닫고 만다. 그래, 사랑은 참 좋은 거였지.
사랑하지 않는 자, 고모는 유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