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의 봄을 즐겨보고자 민트색 봄 니트를 입고 출근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분홍색 봄 니트를 입으신 한 고객님이 들어오셨다. 내 옷과 디자인이 똑같고 색상만 다른 니트였다.그 옷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고객이 나처럼 홈쇼핑에서 4종 세트 봄 니트를 구입하신 분이라는 것을.
내 자리는 사무실의 한가운데고, 파티션까지 있어 고객의 위치에서 잘 안 보이는데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시 일에 집중하다가 몇 분 후에 무심코 객장 쪽을 또 보게 되었다. 분명 아까랑 옷이 똑같은데 이번에는 다른 분이 서계셨다. 뭐지? 하는 찰나 아까 그 고객은 대기석에 앉아 계신 게 보였다. 잠시 뒤, 그 두 분은 똑같은 옷을 입고 앞뒤로 나란히 앉아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의 경우 색상은 달랐지만)졸지에 한 사무실 안에서 똑같은 옷 입은 여자 셋이 있게 돼버린 것이다.
그분들이 계시는 내내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점점 낮추어 결국 의자에 파묻히게 되었다. 원래는 서류를 가지러 한 번은 일어서야 했는데 그 두 분이 가실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서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퇴근 후, 4종 중 하나인 그 분홍색 니트를 엄마에게 넘겨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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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홈쇼핑 방송 4사의 내 회원 등급이다. 요즘에는 홈쇼핑 구매가 확 줄어서 곧 강등될 것이지만, 한 때 월급의 상당 부분을 홈쇼핑에 지출한 나날들로부터 획득한 결과물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물욕이 있는 편이다.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하고, 물건을 살 때 스트레스가 풀린다. 시장이나 대형마트, 문구점, 생활용품점 가는 것도 엄청 좋아한다. 물건이 비싸고 싸고를 떠나 일단 내 손에 뭔가 쥐어지면 입 찢어지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노예이다.
홈쇼핑이라는 구매 채널에 익숙해지고 한창 꽂혔을 때는 집으로 매일 택배 한 두 박스가 배달되었다. 엄마가 하도 모라고 하셔서 한동안 배달 주소를 사무실로 해서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같이 일하던 과장님의 놀림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시선들을 감당하면서까지 불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떤 물건은 안 사면 뒤쳐지는 것 같았고, 어떤 물건은 사게 되면 (내게 없었던) 이미지와 만족감이 단박에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누적되고 합쳐지면 제법 어마어마한 비용이었는데도) 홈쇼핑 사에서 제공하는 쿠폰과 적립금, 신용카드 할인까지 챙겨가며 물건을 구매하는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착각까지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냥 아픈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던 환자였는데 말이다. 한참을 복용하고 나서야 홈쇼핑은 내게 효과 있는 치료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땐 이 약 저 약 내게 맞는 약을 찾아야 했고, 그땐 그게 또 맞는 약인 줄 알았었다.
(비록 출혈이 크긴 했지만) 질리도록 해보고 나니, 이 약이 내 진짜 약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