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Jun 24. 2019

홈쇼핑 4종 세트와 마음의 병


올봄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끝물의 봄을 즐겨보고자 민트색 봄 니트를 입고 출근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분홍색 봄 니트를 입으신 한 고객님이 들어오셨다. 내 옷과 디자인똑같고 색상만 다른 니트였다. 그 옷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고객이 나처럼 홈쇼핑에서 4종 세트 봄 니트를 구입하신 분이라는 것을.

내 자리는 사무실의 한가운데고, 파티션까지 있어 고객의 위치에서 잘 안 보이는데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시 일에 집중하다가 몇 분 후에 무심코 객장 쪽을 보게 되었다. 분명 아까랑 옷 똑같은데 이번에는  다른 분이 서계셨다. 뭐지? 하는 찰나 아까 그 고객은 대기석에 앉아 계신 게 보였다. 잠시 뒤, 그 두 분은 똑같은 옷을 입고 앞뒤로 나란히 앉아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의 경우 색상은 달랐지만) 졸지에 한 사무실 안에똑같은 옷 입은 여자 셋이 있게 돼버린 것이다.

 그분들이 계시는 내내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점점 낮추어 결국 의자에 파묻히게 되었다. 원래는 서류를 가지러 한 번은 일어서야 했는데 그 두 분이 가실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서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퇴근 후, 4종 중 하나 그 분홍색 니트 엄마에게 넘겨드렸다.







L사:  다이아몬드
C사:  플래티넘
G사:  VVIP
H사:  다이아몬드

 메이저 홈쇼핑 방송 4사의 회원 등급이다. 요즘에는 홈쇼핑 구매가 확 줄어서 곧 강등될 것이지만, 한 때 월급의 상당 부분을 홈쇼핑에 지출한 나날들로부터 획득한 결과물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물욕이 있는 편이다.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하고, 물건을 살 때 스트레스가 풀린다. 시장이나 대형마트, 문구점, 생활용품점 가는 것도 엄청 좋아한다.  물건이 비싸고 싸고를 떠나 일단 내 손에 뭔가 쥐어지면 입 찢어지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노예이다.

 홈쇼핑이라는 구매 채널에 익숙해지고 한창 꽂혔을 때는 집으로 매일 택배 한 두 박스가 배달되었다. 엄마가 하도 모라고 하셔서 한동안 배달 주소를 사무실로 해서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같이 일하던 과장님의 놀림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시선들을 감당하면서까지 불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떤 물건 안 사면 뒤쳐지는 것 같았고, 어떤 물건 사 되(내게 없었던) 이미지와 만족감이 단박에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적되고 합쳐지면 제법 어마어마한 비용이었는데도) 홈쇼핑 사에서 제공하는 쿠폰과 적립금, 신용카드 할인까지 챙겨가며 물건을 구매하는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착각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냥 아픈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던 환자였는데 말이다.  한참을 복용하고 나서야 홈쇼핑은 내게 효과 있는 치료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땐 이 약 저 약 내게 맞는 약을 찾아야 했고, 그땐 그게  또 맞는 약인 줄 알았었다. 

(비록 출혈이 크긴 했지만) 질리도록 해보고 나니, 이 약이 내 진짜 약이 아니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늘도 회사에서 경도 이상의 빡치는 일이 있었다.

 

 가끔은 참 헷갈린다.

 병이 생겨서 약을 먹는 게 아니라,

 약을 먹기 위해 병을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래도 여전히 약발 좋은, 진짜 약 꼭 찾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