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거기? 싱가포르

by 앤디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흐릿하지만,
몇 가지 기억은 잊히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오랜 시간 자리한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수능을 막 마쳤을 때였다. 운 좋게 입학이 빨리 결정된 상황이라 진정한 의미의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신입생을 미리부터 관리해주려는 학교의 깊은 뜻이었는지 입학 전 방학 동안 들을 수 있는 영어회화 강좌가 개설되었다. 학교 분위기에 미리 적응도 하고, 새 친구들도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수강신청을 하였다. 영어회화 수업은 매번 조가 나뉘었고 그 날의 토픽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 날의 토픽은 상황에 맞는 장소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ㅡ친구를 만나서 수다 떨기 좋은 장소는?
ㅡ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좋은 장소는?

이런 종류의 질문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스타벅스를 말했고, 누군가는 T.G.I 프라이데이스를 말했다. 누군가 말할 때마다 듣는 애들의 반응도 아 거기? 괜찮지. 하는데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가본 적도 없거니와, 이름도 다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름 자체도 한 번에 못 알아들었는데 꿀리기 싫어서 아무런 코멘트 없이 잠자코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사는 인천은 두 장소 모두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난(2001년) 이후에 생겼던 것 같다. 놀랬던 건 그때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 중에 분명 나처럼 인천에서 온 두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둘은 그 장소에 가 본 눈치였다. 이로써 그 강의실 안에서 거기를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도 신경 안 썼는데 19살이었던 나는 그 상황이 속상하고 창피했다. 상황에 맞는 장소를 척척 적어내는 친구들과 달리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내 교재를 그저 가리고만 싶었다.

그리고 이런 어린 시절 기억들은 생각지도 못한 때 한 번씩 갑자기 나를 툭 건드린다. 그래서일까. 랜드마크 부자인 싱가포르 여행을 가기로 계획한 순간, 아 거기? 말할 수 있는 장소만 집중 공략했다.



싱가포르 갔다 온 거 티 내기로는 이 만한 장소가 없다. 수영장에서 본 야경은 역시 멋있었다. 호텔 옥상에서 밤에 수영하는 것도 신선했다. 거대 자본을 실감했지만 장소 자체의 치명적인 매력은 찾지 못했다. 명성이 곧 매력은 아님을 새삼 느꼈다.




싱가포르 가면 꼭 먹어야 한다는 음식. 이것도 공식처럼 특정 레스토랑이 소개되어있다. 여행객에게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은 탓인지 예약이 필요하다고 하여 (어차피 유명한 데서 먹을 거면) 현지인에게 더 인기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가기로 했다. 현지 맛집답게 오랜 시간 줄 서서 기다린 뒤에야 먹을 수 있었다. 느낌상으로도 외국인은 우리뿐이었다.


싱가포르 여행은 3박 4일이었는데, 일부러 매일 다른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 루트도 숙소 위치에 맞게 짰다. 이 숙소는 내가 지금껏 갔던 호텔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만족도가 큰 곳이었다. 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시설은 모던하고 무엇보다 엄청 조용했다. 작년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여기서 만나 내가 아는 그 산책로를 걷는 바람에 아 거기? 를 위한 내 쇼윈도 여행에 더욱 힘이 실렸다.




싱가포르를 떠나는 날 오후 비행기 전까지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있었다. 놀이공원 갈 때마다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활개를 치는 것을 느낀다. 내가 노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노는 것이다. 평소 트랜스포머 관심도 없었는데, 놀이기구로는 왜 이렇게 재밌는 건지 열 번도 더 타고 싶었다.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 이 장소들에 대해 아는 체할 기회는 사실 10번도 채 안되었다. 가봤다는 거 외에 개인적으로 할 말이 많은 장소도 아니었다. 그냥 19년 전에 느꼈던, 감추고 싶었던 그 뭔가를 조금은 극복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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