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어른의 판타지, 시드니

그 첫 번째 이야기

by 앤디



판타지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판타지로 분류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여태껏 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영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 뒤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회사에 입사하고 막연하지만 분명하게 했던 유일한 다짐은 내가 버는 돈으로 '어디든 떠나자'였다. 그리고 정말 이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행을 결정하고 계획하는 데까지 일사천리라 놀라는 경우가 많은데,

뭐든지 좋아서 하는 건 (있는지도 몰랐던) 내 안의 에너지가 밀어붙이는 거라 정작 나는 그 영문을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껏 다녀왔던 여행들을 정리하면서 보니 여행이 나에게는 일종의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꽤 많은 것을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어른이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나이 들수록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직장을 다니기로 한 것은 분명 내 뜻이 맞았지만, 발을 들인 이후에는 매번 남 뜻이 내뜻보다 우위에 있었다.
못 먹어도 고, 내 선택에 후회란 없다 제법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씹히고 밟히면서 점점 나 다움을 잃어갔다. 노동력 제공하고 월급 받는 것 외에 나까지 잃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대부분을 남 뜻대로 움직이다 번 돈으로 (비교적 긴 시간, A부터 Z까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여행이었다.

나를 마주 하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전부터 가졌던 막연한 욕망이었는데 직장생활의 공허함이 더해지면서 현재 내 상황에서, 내가 가진 상상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판타지 여행이 것이다.



시드니에 가기 전, 그곳을 떠올렸을 때 내 머릿속을 떠다닌 단어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러셀 크로우 그리고 영화 스크림 여자 주인공(이름이 시드니)이었다.

여행 루트를 짜면서 몇 권의 책을 읽긴 했지만 직장인 여행기간의 한계와 특성상 장거리 여행은 효율적인 워밍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행경력도 제법 쌓였으니 이번만큼은 나만의 완벽한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가 광고했던 여행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서 '현직 전문직 직장인과 함께 하는 로컬처럼 4시간 보내기'를 시드니 여행 첫날로 예약했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목에 있는 전문직과 직장인이라는 단어에 신뢰감과 공감대가 훅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들이 칭찬 일색이라 안심하고 예약했다.



가이드님이 어떻게 호주에서 지내게 된 건지 내가 먼저 물어보았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수능 얘기까지 번져 자연스럽게 우리가 동갑내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는 곳은 달랐지만 또래다 보니 고민이나 상황이 비슷해 쉽게 친근감을 느꼈고 진짜 수다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감히 말하면) 4시간 동안 대화를 통해 내가 느낀 가이드님은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고, 일하는 시간외에는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모범생스러운 범위 안에서 자유와 일탈을 누리는 그 삶의 패턴이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는 혼자 낯선 곳에서 (그야말로 독립적으로) 본인 만의 삶을 개척하고 있으니 멋있는 걸로는 저만치 앞에 있다는 것이 나와 달랐다.




4시간의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가이드님이 사는 동네 맛집에서 브런치를 먹은 것과 러셀 크로우가 살았다는 아파트 옆을 지나간 것과 가이드님이 중간중간 찍어 준 내 인생 샷들이다.




그리고 그다음의 내 여행 일정에 대해 나누다가 나온 이 이야기다.

ㅡ 내일이랑 모레 블루마운틴과 포트스테판을 가보려고 해요. 액티비티로는 스카이다이빙이랑 하버브리지 클라이밍을 미리 예약했어요. (마침 하버브리지가 보여) 혹시 하버브리지 클라이밍 해보셨어요?

ㅡ 네. '회식'으로요.

ㅡ 네?! 회식이요?!!! 아... 저녁때 올라가면 정말 멋있었겠네요. 그런데 해지고 올라가기에는 좀 무서울 것 같은데.

ㅡ 아니요. 낮에 갔어요.
'저녁'에 회식을 하면 아무도 안 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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