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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자 Apr 26. 2023

더 더 좋아질 거예요.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이번 주 글제를 받고 고민할 거 없이 나는 지금이라고 말한다. 나이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좋다. 신체적으로야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지만 마음으로는 자유와 행복이 더해 간다. 둘째 입시가 끝나고 나니 훨훨 자유로웠다. 공부도 재능이라 생각하는 나는 녀석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키웠다. 어쩌면 워커홀릭이던 내가 아이들을 세심히 들여다보지 못한 탓에 아이들은 공부에서 자연스레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첫째가 성적표를 받아오던 날 남편과 나는 둘이 조용히 식탁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에게 물었다. "이런 성적 받아본 적 있어?" "아니" 둘 다 아니었다. 그리고 우린 조용히 성적표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편과 나는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고 살았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봤고 공부의 끝이 둘 다 대기업 월급쟁이가 전부였다는 걸 알고 회의에 빠졌을 즈음이다. 우리가 아는 건 공부밖에 없는데 혹시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으니 아이를 닦달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 마음 그대로 지키며 살았는데 남편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다행히도 두 녀석은 각자 재능 찾아 잘 살아가고 있다.


둘째가 재수를 하면서 자꾸 아쉬워했다. 더 내려갈 데 없는 9등급 고3 5월부터 시작한 공부. 재수를 하면서 공부해 보니 재밌다며 아쉬워한다. "엄마가 나 좀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고 시키지 그랬어요" 말을 할 때 미안함과 아쉬움이 겹쳤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대학 입학을 하고도 아쉬워했다. 반수를 할까 편입을 할까 고민하는 둘째에게 그만하면 됐다 그 노력이면 앞으로 뭐든 할 수 있겠다 다독이며 대학은 인생에서 문 하나 여는 것이니 앞으로 100년도 더 살아갈 네 인생에 입시에 너무 힘 빼지 말라고 말해줬다. 이 또한 50이 넘게 살아오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내가 아이를 온전히 옆에서 지켜본 것은 코로나 덕분이다. 일을 쉬면서 3년을 온전히 지켜봤다. 내 아이가 이렇구나 처음 알게 됐고 미안했다. 일찍이 공부라는 걸 해 볼 수 있게 조금만 더 관심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많았다. 나에게는 항상 일이 우선이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편하게 키워 좋았다고 하면서도 방치되는 것 같아 상처도 있다고 말한다. 100% 만족은 없다. 상처 없는 인생도 없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것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구나 생각한다. 지나고 나면 후회가 남거나 아쉬움이 남거나... 인생은 둘 중 하나이다. 아이들도 내 나이쯤이면 또 다른 걸 깨닫겠지.

만약 내가 아이들하고 공부 닦달하고 지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완벽하고 싶어 하는 내 성격에 시선이 아이들에게 향했으면 우리 관계는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은 부모가 강요하고 아이는 지쳐 나가떨어지는데 우리 집은 거꾸로다. 두 녀석 다 자기 자식들은 처음부터 공부시킬 거란다. 어쩌냐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녀석들 가엽다. ㅋㅋㅋ


아무튼 나는 지금 자유롭고 행복하다. 나이 먹어 적당히 거절의 기술도 장착했고 크게 예의를 벗어나지 않으면 살짝궁 들이대는 뻔뻔함도 갖췄다. 내려놓을 줄 아는 지혜도 조금 생겼고 다름을 인정하고 틀림을 무시하는 배짱도 생겼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 더 들으려고 하는데 이건 기분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젊은 날의 나는 거절을 못 했고 무모하게 도전도 했고 아팠다. 실패를 다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며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나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져 급기야는 우울감에 몇 년을 마음고생했다. 이런 나를 치유해 준 것은 둘째였다. 3년을 숨죽이고 지켜보며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그 녀석이 조용히 나를 가르쳤다. 내가 아이들을 돌본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나를 가르친다.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고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집으로 오는 지하철 입구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생각난다. 내 스타일이 좋다고 칭찬을 해 오셨다. 같은 교회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니 반갑다고 인사하시며 "앞으로 더 더 좋아질 거예요. 얼마나 근사한데요~" 그러고 지나가셨다. 짧은 한마디 말과 온화한 얼굴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난다. 그 어떤 전도의 말보다도 생명력이 있었다. 신앙생활에서 아직 나는 더 더 좋다는 그분의 말을 체험하지 못했다. 어쩌면 한쪽 발만 담그고 나그네처럼 다녀서 그런가? 젊은 날에는 신앙생활도 전투적으로 했다. 지금은 경계인처럼 있지만 이대로가 좋다.


잔뜩 힘이 들어가서 경제적인 성공만이 유일한 것인 양 앞만 보고 뛸 때 나는 종종 허무했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회의감이 들었다. 돌아보면 그런 치열한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좌절하고 회복하는 시간들이 반복되면서 여물어 갔다. 나이 드는 게 좋다.  


새벽마다 글을 쓴다. 제대로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들여다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쓰며 커가고 있다. 쓰면서 읽기를 목말라한다. 지금 나는 부러운 것이 글 잘 쓰는 사람이다. 단어 하나에 감탄하고 후루룩 빨려오는 한 줄 글에 시샘한다. 잘 쓰고 싶은 욕망을 가져본다. 우연히 만난 그 할머니의 말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덕담을 나눈다. " 앞으로 더 더 좋아질 거예요. 얼마나 근사한데요.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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