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스물 넷. 2년 뒤면 엄마가 결혼을 했던 나이고, 6년 뒤면 어른의 상징 같은 서른이 된다. 내가 성인이라는 자각은 여전히 부족해도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서는 꽤나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느끼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렇다. ‘잘 몰라서’라는 변명 뒤에 숨을 수 있는 편한 나이는 이제 지났다. 스물 네 번의 사계를 거친 나는 마냥 어린애로 남아있을 수 없다. 휴학으로 잠시 멈추어도 결국엔 막을 수 없는 졸업과 동시에 책임이 가득한 사회로 떠밀려 나가는 날이 머지않았다. 결혼이나 출산, 육아처럼 나와 동떨어져 있다 생각한 것들도 이제는 슬금슬금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이렇게 착실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간에 올라타 있는 것 뿐이지만. 가끔은 서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흔들흔들, 내가 가고 싶은 곳보다는 파도의 흐름에 따라 물살을 가르는 나는 한 순간 집중을 놓치면 한참동안 바다에 빠져 허우적댄다. 파도는 멈추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운명이다. 멀미를 하지 않으려면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너무 작으니까.
나는 항상 작았다. 0.1kg의 차로 간신히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았던 나는 언제나 작고 깡마른 아이였다. 남들처럼 똑같이 성장기를 겪었으나 내게 돌아오는 센티미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작고 마른 몸은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에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가는 팔을 가진 여자애들이 나오는 TV와 살 안 찌는 체질을 부러워하는 친구들 곁에서 나는 내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없이 자라났다. 남들보다 훨씬 작은 키는 내 개성이 되었고 마른 몸은 장점처럼 느껴졌다.
내 작은 몸이 갖는 의미가 뒤집힌 순간은 불현듯 찾아왔다. 처음 의식하게 된 것은 체력의 한계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목적 없이 주어지는 삶을 채워 나가듯 살았다면, 대학에 온 후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뤄 나가고 싶어했다. 공부도 좋아서, 동아리도 술자리도 연애도 좋아서 했다. 그러나 한 번에 하나씩 몰두하기에도 벅찼다. 원하는 것을 모두 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체력. 24년 간 한 번도 나와 연관된 적 없는 단어였다. 한계의 원인은 뻔할 정도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모로 보나 내 작은 몸 뿐이었다.
그렇게 작은 몸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되었다. 체력 하나를 이루기 위해 다른 일상들을 모두 잃어야 하는 상황은 나를 제자리 걸음으로 남아있게 만들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체력의 한계는 내 몸의 한계, 내 몸의 한계는 나의 한계처럼 느껴졌다. 나의 작은 몸만큼 내 세계도 졸아들고 내 미래도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제 난 새파랗게 어린 법적 성인에서 벗어나 진짜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도 여전히 나는 초등학생 때와 별 다르지 않은 몸으로 살아간다. 부모님으로부터 전혀 정신적, 경제적 독립이 이루이지지 않은 지금의 나는 마치 아이처럼 어린 몸에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미성숙한 몸에 갇힌 나의 정신은 그 몸에 맞춰 점점 더 작게 수축한다. 동시에 다른 가능성도 문을 닫는다. 이상적인 성인 여성의 몸과 거리가 먼 유아적인 몸은 경쟁에서 배제된 기분을 들게 한다. 성적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 작은 몸으로는 나를 ‘진짜’ 여자로 인정하기 힘들게 한다. 역겨운 성적 대상화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잔잔한 자기혐오가 자취를 남긴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나. 엄습하는 위기감에 큰돈을 주고 운동을 시작했다. 갑갑한 나의 몸이 든든한 나의 몸이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 당연히 체력의 한계는 나의 한계가 아니다. 몸이 작다고 해서 정신이 미성숙한 것도 아니다. ‘진짜’ 여성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가끔 나는 내 몸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고 때로는 밉다. 그리고 작은 몸이 모든 한계와 문제의 뚜렷한 원인이라도 된 것처럼 원망스럽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영혼이 성숙해지는 것처럼 몸도 더욱 성숙해진다면 좋을텐데. 날로 먹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열심히 운동이나 해볼 참이다. 내 작은 몸이 더 이상 미워지지 않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