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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Dec 23. 2021

되돌릴 수 없는

2021-06-01

지나간 것들이 남기는 특유의 향이 있다.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움이 베어 나오는 사람이 준 향수는 여전히 처음과 같이 싱그러운 시트러스 향을 뿜어낸다. 기억 한 조각에 머물러있던 히트곡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쿵쿵대며 울리는 때가 있다. 뿌옇게 흐린 기억 속 나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들의 음색에서는 진한 추억의 향이 난다. 한동안 어떤 것을 봐도 울렁이지 않던 가슴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마음이 목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깨어진 것의 미학이라고 해야 하나.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미어지는 가슴과 예전에 대한 향수가 잔뜩 버무려져 고유한 맛을 낸다. 원치 않은 해체를 겪은 그룹은 마스크가 없던 시절과 어딘지 비슷하게 느껴진다. 완벽에서 멀어져 비틀거리는 모습에 묻어나는 이상한 동질감이 마음에 든다. 나는 이렇게 매일이 흔들리고 앞이 깜깜해서 넘어질 것만 같은데, 후회와 되돌리고 싶은 마음에 잔뜩 절여져 있는데 그들도 마치 그런 것 같아서. 


3년 전 오늘이라며 내게 들이미는 사진 속 나는 흠칫 놀랄 만큼 낯설다. 많은 것이 똑같은데 더욱 많은 것이 변해간다. 하루는 참 느린데 일년은 눈 깜짝 할 새에 지나간다. 별 다를 것 없는 하루가 모여 영겁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는 시간들을 흘려 보낸다. 지나가 버린 시간에 남긴 내 모습이 마음에 걸려 몇 번이나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은 시간 여행으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한다. 하지만 영화 끄트머리에서 그는 결국 다시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 사건 없이 흘러가는 것 같은 평범한 하루에도 빛나는 순간들은 촘촘히 숨어있다. 그 순간들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흘러 보내는 건, 이 하루가 내일도 반복될 거라 예상하는 권태 탓이다. 6월의 첫째 날이 왔다. 휴학한 뒤로 모든 날들이 어영부영 지나가는 것만 같아 슬퍼하면서도 이런 날이 지속될 거라는 달콤한 안일함 속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권태는 편하지만 아름답지 않다. 되돌릴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 충실히 임하는 순간은 눈부시다. 


쨍쨍한 햇볕에 여름만큼 무더운 날씨를 자랑하던 예전의 5월이 무색하게, 이번 해는 전염병 시국을 반영했는지 침울하고 쌀쌀한 날이 이어졌다. 6월의 첫날도 여름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온도로 스타트를 끊었지만 새로운 달의 시작이자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은 어딘가 모르게 웅장했다. 쳇바퀴처럼 향하는 학원으로 옮기는 걸음의 보폭도 어제보다 조금 넓어졌다. 잊지 못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늘의 습기와 햇살은 다시 찾아오지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미동도 없던 나의 심장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열렬히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오늘에 대한 자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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