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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Mar 28. 2022

쓰고 싶은 것이 없다

2022-03-28

이상하다. 쓰고 싶은 것이 없다. 말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던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조막만한 가슴만이 남아있다. 자판을 두드리는 감각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어지러울 때가 있었는데. 

단편적인 이미지들만 머릿속을 지나다닌다. 수풀 사이로 아른거리는 스커트 자락과 귀 옆을 살랑이는 머리칼, 나른한 햇빛을 받아 노란빛을 뿜어내는 울타리,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내 몸, 전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받아들여야 한다. 들이면 안되는 것에 발을 들인 느낌이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을 것. 지나간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떡해, 흔들리는 걸. 지반이 꺼지면 나는 속절없이 밑으로 밑으로, 그렇게 한없이 밑으로 하강하다 저 밑바닥의 의심을 만나게 된다. 아주 먼 미래, 사실은 아주 가까운 현재가 날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 일 없는 오후가 되면 할 일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누구보다도 바쁜 체하며 피곤해한다. 

나를 알 수 없는 많은 나날들을 거쳐 이제야 날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을 닫아버린다. 나는 문을 열려 애쓰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그 문 안에 갇혀 세상을 바라볼테니까. 갇힌 나는 말이 없다.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부서져 사라져 버렸다.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자꾸만 내면을 천착하며 그 속에 갇히는 인간일 뿐인데. 누구보다 내밀한 단면을 이야기 하면서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청춘은 짧고 나는 이제 청소년 자격을 잃어가는 중이다. 아무렇게나 쓰는 글처럼 아무렇게나 채워지는 나날들이 나의 청춘에 때처럼 끼어든다. 나는 곰팡내가 잔뜩 나는 청춘을 끌어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나를 쳐다본다. 누구도 알 수 없다. 눈을 감았다 뜨면 노인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젠 선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토할 것 같으니까.

사랑은 또 하나의 설움이 되고 우정은 또 하나의 아픔이 되고 구름은 저 멀리 아기 강아지의 엉덩이 같이 흘러가는데 나는 이 한가로이 아름다운 날씨에 집 안에 갇혀 자판을 두들긴다. 의미없이 타닥 탁탁 이 소리를 들으려고 글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으면 휘청이는 마음이 네모칸 속에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위스키가 얼마나 독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렌지 주스로도 취할 수 있는 걸. 내가 움직이는 동작이 내 의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쯤에는 아름다운 꿈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 똑같은 음악만 반복해 듣다가 새로운 음악을 라디오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그걸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적이 내게 일어났을 지. 

이렇게 가슴이 꾹 눌려 답답해질 때면 소리를 지르고 싶다가도 아무 말도 안하게 된다. 속으로 삼키고 소화하면 사라질거라 생각하니까. 꿀꺽꿀꺽 내 마음을 한 입에 들이키고 잊고 싶었던 기억들마다 족족 선명히 떠오르고 잊고싶지 않은 기억은 스륵 몸을 감추네. 

말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서 주절주절 써내려가는 것이 우스워진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후회? 막연한 그리움? 안타까움?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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