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도보여행 영덕-울진 (2)
이미 내 머릿속은 피톤치드 속에서 망망대해를 보고 있었다.
인터넷 서치를 통한 계획 세우기는 우리 스마트한 백수들의 특기 아닌가. 완벽한 실행이 아닌, 완벽한 상상을 위한 정보조사에 착수했다. 구글과 네이버 블로그를 둘러보다 나의 상상은 영덕-울진을 넘어 경주와 포항, 저 멀리 강원도까지 다녀왔다.
여기서 정보 안내를 하고 넘어가자면,
해파랑길이란.
부산에서 강원까지 동해안을 따라 조성된 750km의 걷기 여행길로 전체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코스만이 아니라 멋진 자연경관과 문화유적, 이야기가 묻어나는 장소까지 알차게 구성되어있으니 마음에 드는 코스만 고르면 도전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50개 코스 중 이번에 선택한 곳은 영덕의 축산항에서 출발하여 최종 후포리에 도착하는 22 ~ 23 코스로 총길이 28km, 기간은 1박 2일로 정했다. (사실 24코스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으나 저질 체력으로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왜 내가 하필 이 코스에 꽂혔을까. 나는 혼자 여행을 가본 적도 없는데 하물며 경상도를? 혼자? 참고로 여기는 인천이다. 아주 멀다는 얘기. 사람 많고 교통편 좋은 부산이나, 볼거리 많고 음식도 맛있다는 경주-대구도 아닌 영덕이다. 영덕대게는 익숙하지만 '대게'가 붙지 않은, 홀로 있는 영덕은 어쩐지 낯설고 멀게 느껴진다. 여하튼, 난 떠나기로 결심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축산항'이라는 곳에 가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드디어 걷기 시작이다. 첫날 나의 목표는 단 하나. 오늘 잘 곳을 찾아야 한다. 예약을 안 했다.
자 다시 처음부터.
새벽 5시 반 기차. 포항행 ktx를 타야 한다. 영덕은 그곳에서 바로 무궁화호를 갈아타면 된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긴장과 약간의 설렘 때문인지 피곤하거나 졸리진 않았다.
열차는 굉장한 속도로 까만 밤을 달렸다. 눈만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창밖엔 붉으스름 동이 트고,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보고자 카메라를 들었다가 렌즈 뚜껑만 잃어버렸다. 이런, 아직 여행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 불안한 느낌은 뭐지. 액땜이라고 생각하자.
포항에 도착하니 찬바람이 훅, 뼛속까지 치고 들어왔다. 이 추위에 도보 여행을 할 수 있으려나. 이미 친구들에게 떠버려 놓은 터라 취소할 수도 없었다.... 남의 평판에 민감한 나에게 '그럼 그렇지..'라던가, '그럴 줄 알았다..'라는 비아냥은 있을 수 없다. 이놈의 입방정. 영덕행 무궁화 열차가 어찌나 반갑던지 후다닥 몸을 실었다. 내 생에 무궁화 호를 타보다니. 어린 시절 탄 적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건 내 기억에 없는 이야기고, 자의식이 생긴 후 첫 무궁화 호다. 활자로만 접해봤던 그 유명한 무궁화 호. 여행의 설렘 속에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며 오마이걸 음악을 감상하려는데 웬걸, 앞에 앉은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셨다. 나도 그들의 통화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 하아, 즐길 틈을 안주는 구나.
아침의 여유로움이 부산스럽게 흘러간채 나는 영덕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축산항에 가면 나의 도보 여행이 시작되리라. 벌써 시간은 9시를 향해 가고 있는데.
물어물어 작고 귀여운 버스를 탔다.
'축산항 가나요?'
'어데요? 축산? 축산 갑니더.'
주변에 사람은 없고 듣는 사람도 나 혼자인데, 달팽이관을 때려 박는 크고 의외로 친절한 억양의 사투리를 들으니 비로소 아 여기가 경상도구나~ 싶다. 이런 강력한 사투리는 20살 이후로 처음인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고 편안했다. 버스에서의 1시간 남짓이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 편하게 쉬었던 시간인 것 같다. 아 한 가지만 빼면. 나는 1,300원을 내고 버스표를 샀는데, 여기 승객은 천 원짜리 지폐를 넣고 탄다. 기사님은 승객이 돈을 내는지 안 내는지는 관심이 없다.
달리는 버스 옆으로 펼쳐지는 동해 바다가 장관이다. 이렇게나 바다 가까이 버스가 달리다니. 나로서는 신선한 광경이다. 경사진 길을 달릴 때는 내 눈높이보다 위에 수평선이 펼쳐져 있어 잠깐 눈을 깜박이면 와락 바닷물이 덮쳐올 것 같았다.
수산시장을 지날 때 한 할머니 한분이 탑승했다. 탑승과 동시에 너무 놀랐는데, 그분께서 삼치를 구매하셨고, 손질하지 않고 통으로, 그 흔한 봉투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꼬리만 잡은 채 버스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그야 말고 삼치 쇼핑.
비린내가 어디서 나나 했더니 생선을 그냥 바닥에 놨다고 한소리 하시는 기사님도, 싸서 샀다고 쿨하게 말하곤 본인 키의 반만 한 삼치를 들고 '안녕히계시소~' 하고 내리는 할머니도 둘 다 귀엽다. 죄송스럽게도 여행자의 눈으로는 남의 일상이 그저 흥미롭고 재미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내 일상이 지겨워 여행을 선택한 자가 과연 누군가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그 큰 삼치를 들고 집까지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며, 기사님은 지워지지 않는 비린내를 열심히 닦아내야겠지.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건만 나의 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1,000 보도 걷지 않았고, 다시 상기해보자면, 나는 도보 여행을 '떠나는' ,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