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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on Mar 12. 2021

나는 외로운 적이없었나 보다

해파랑길 도보여행 영덕-울진 (3)


  축산이다. 

스마트한 백수는 사전조사를 철저히 했다. 이미 네이버 거리뷰를 통해 코스를 완주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축산 정거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무려 이십여 킬로미터를 걷게 될 텐데 뭔가 남기고 싶었던 나는 스탬프를 찍기로 했다. 그러나 어떠한 종이 쪼가리 하나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근처 편의점에서 작은 수첩과 빨간 모나미 플러스펜을 샀다. 



  "여행 오셨나 보네예~" , 내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자  "좋은 여행 되이소~" 하며 친절하게 인사해준 편의점 사장님. 덕분에 시작하는 기분이 산뜻했다. 하지만 약간 이상한 기분도 들었는데, 열심히 일하고 계신 분 앞에 선 내가, 너무 놀러 온 티가 너무 나니 조금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아주 대 놓고 즐거움을 보이기가 적잖이 민망스러웠다. 나는 염치가 있는 백수다.



  자 드디어 걷기 시작. 대략 10시부터는 시작하겠지 예상했으나, 11시가 다 되었다. 나의 완벽한 플랜이 어디에서 이런 크나큰 오차를 가져왔을까. 약간 조바심이 났다. 나는 당장 오늘의 잘 곳을 예약하지 않아서 아무리 못가도 고래불 해변까지는 가야 한다. 그전까지 마땅히 잘 곳이 없었고, 지금은 겨울이니까 해가 일찍 진다. 6시 전에 도착하려면 바쁘다. 갈 길이 멀다. 조금이라도 해가 지기 시작하면 밤은 금방이다. 밤이 되면 내가 미리 파악해둔 네이버 거리뷰가 헷갈려진단 말이다. 




  22코스의 시작은 작은 동산을 오르는 것부터. 

해안길과 등산길 중 선택이 가능한데, 도착할 때까지도 결정을 못했다. 해안길로 가면 바다를 맘껏 볼 수 있고,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참고로 나는 등산을 싫어하고 바다를 좋아하는 인간이니 당연히 해안길을 선택해야 맞지만 안타깝게도 해안길은 '공식 코스'가 아니다. 그 사실은 나 같은 고지식한 인간에게 꽤나 중요한 문제다. 



  많은 인원이 고심해서 결정했을 코스는 아주 많이 돌아가는 길이지만 봐야 할 것이 있고 (혹은 봐주었으면 하는) 굳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여 나의 게으름 때문에 다시 못 올 이곳에서 뭔가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리도 내가 등산코스로 발을 들이게 한 이유였다.






  

산을 오른 지 5분도 안되어 후회했다. 


  누군가 물어준다면 아주 강력하게 해안길을 선택하라고 추천할 것이다.

토요일인데 등산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없다니. 등산 초입에 1명 스친 것이 전부였다.  산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시간을 많이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3시간 여를 산속에서 헤매었고, 생각보다 가파른 산을 오르면서 다시 내려갈까 생각했지만 사람이 그렇게 단호하기가 어디 쉽나. 게다가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와 버렸다고 생각하는 큰 착각에 빠졌다.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건 없다. 돌아갈까 생각이 들었을 땐 꼭 돌아가자.  










  산속에 있는 시간이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다. 내가 오른 산은 해발 285미터의 대소산으로, 동해안을 내려다보고 있어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 신비로운 해안선이 꼭 우주에서 지구 표면을 보는 듯했다. 눈 앞에 가득 찬 파란 해안선을 마주 보며 차가운 물 한 모금 마실 때의 쾌감은 경험하지 않고서 그 청량감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뇌부터 창자의 돌기까지 찬물로 박박 씻겨지는 짜릿한 느낌이다. 



  정상에서는 또 어떤가. 산의 정상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 뿌듯함과 탁 트인 전경에 취한다. 이 곳 대소산의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바다와 항구, 어촌마을까지 한눈에 보인다. 혼자서 힘들게 올라와 멋진 경치를 마음껏 누렸다. 해가 머리 위에서 뜨겁게 타올랐고, 그늘도 사람도 없었지만 자유로웠다. 그 순간에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나 혼자있는게 분명했다



  저 경치를 누구의 눈치도 없이, 오롯이 나 혼자 누리는 자유를 제외하면, 산속을 걷는 내내 불안했다. 초행길에 산속이다 보니 마음만 다급하고 빨리 하산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름다운 경관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명상에 빠지고 싶었지만, 자꾸 가야 할 곳과 시간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는 몰입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눈치 없이 시간이 흘러 날이 진다면 그땐 진짜 모험이 될게 뻔하다.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떠나왔지만 막상 아무도 없는 곳에 발을 들이자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깜박 잠이 들어도 금세 깨어날 수 있도록 사람의 소음이 필요했다. 혼자가 아님을 인지시켜줄 기댈 곳이 필요했다.


  외로웠다. 나는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에 외로웠다. 돌아갈 곳이 없고, 시간도 많다면 외로움 없이 이 경관과 적막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계획 없이, 목표 없이 살게 되면 외로움도 초월하게 될 것 같다.

 



 목은 이색 기념관을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은 드디어 마을이 다가왔다는 반가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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