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상대적이야

풍선초 이야기(28)

by 리오라

몇 주째 집 안은 비상사태예요. 심오는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다시 응애들이 나타났다며 씩씩대면서 전쟁을 선포했어요. 신기하게도 심오가 전열을 가다듬을 때마다 어디서 그렇게 몰려오는지, 응애들도 잽싸게 전투태세를 취했어요. 정말 내 몸이 전쟁터가 된다는 건, 지치고도 슬픈 일이에요. 날 위해서라지만, 여기저기 뿌려지는 그 성분을 버텨내는 건 쉽지 않아요.


예전에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 전쟁터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요. 그때 나는 ‘전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왠지 무시무시한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상상도 못 할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전쟁터란 꼭 폭탄이 날아다니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곳처럼 일상 속에서도 갑자기 펼쳐질 수 있는 거였어요.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천국 같던 이곳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다시 평화로운 곳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도 생겨요. 내가 시작한 전쟁은 아니지만, 일단은 잘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어요. 다행히 심오도 열심히 도와주고 있으니, 그렇게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이미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를 더 잘 지키고, 아닌 건 단호히 밀어낼 힘도 생긴 듯해요. 얼른 이 몸에 생긴 점들만 사라져 준다면…


단단한 마음 씨앗 위로 희망이 피어난 걸까요. 맥없이 처져 있던 내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내 몸엔 흰 줄과 작은 점들이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쁨이 솟았어요. 신기한 일이에요. 이게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일까요?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전쟁을 끝내려면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고요. 그게 뭔지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아요. 내 마음의 힘이 세지자, 마침내 제법 큰 응애 하나가 항복했어요. 처음 보는 모습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미운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좀 귀여웠어요. 이렇게 작고 귀여운 녀석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니.

“미안해. 너무 더워서… 잠깐 피하려고 온 거야. 전엔 더 힘든 집에 있었는데, 여긴 주인이 좋다는 소문 듣고 찾아왔거든. 근데 여기도 만만치 않네. 날 너무 괴롭혀.”


“미안하지만, 널 좋아할 주인은 없을 것 같아. 이 집 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니까 저러는 거잖아. 내 몰골 좀 봐, 얼마나 상했니!”


“그럼, 좋은 사람이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 거야? 사람은 그런 존재야?”


“그럼. 관계는 상대적이야.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은 없어. 나한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럼 나는 어디서 나에게 좋은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너희가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돼. 그러면 누구라도 너희에게 좋은 주인이 되어줄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희가 나타나는 순간 모두 얼굴을 찌푸릴 거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얘네가 정말 나쁜 존재들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그렇게 나를 괴롭혀왔는데도 말이에요. 미운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어요.

대장 응애는 오늘 밤만 지나면 식구들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약속했어요.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잘 헤어지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동안 쌓였던 화를 다 쏟아냈다면, 더 큰 전쟁이 났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조용히 이별을 잘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성숙해졌다는 증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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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강한 성분들과 싸우느라 몸에 상처가 많이 남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내 마음엔 상처보다는 굳은살이 더 생긴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이 깜깜한 밤에 조용히 말없이 떠나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준다면, 내일 아침 심오의 얼굴도 분명 밝아질 거예요. 늘 나만 보던 시선이 조금씩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심오 걱정까지 하는 걸 보면요.


그런데, 일이 잘 해결되어 가는데도 이상하게 슬슬 몸이 살짝 쑤시기 시작해요.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저 아프다고만은 할 수 없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이랄까요.


도대체 이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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