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의 결론,

풍선초 이야기(33)

by 리오라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아플 겨를도 없이, 심오의 손에는 가장 붉게 물든 풍선 하나가 들려 있었어요. 마치 외계인을 처음 본 인류학자처럼 놀라움과 경이감, 당혹스러움, 감탄이 한데 섞인 얼굴이었죠. 아니, 어쩌면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랑 더 가깝겠네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간의 모든 순간을 회상하며, 드디어 뭔가를 ‘이뤘다’는 표정이더라고요. 심오가 그렇게 나를 소중히 바라보니,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준 것 같았어요. 그렇게 몸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지만,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원래도 풍선은 가볍지만, 마치 고통 없는 결과를 누리는 것처럼 기쁘기까지 했어요. 인생이 늘 이렇다면 좀 심심하겠지만, 나쁘진 않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심오가 혼잣말을 시작했어요. 나한테 말을 거는 건지, 혼자 중얼거리는 건지 영 구분이 안 갔죠. 어쨌든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에요. 말이 끝없이 쏟아졌거든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더니… 와, 진짜 이렇게 풍선도 많이 열리다니, 너 정말 멋져.

진짜 말이야,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잖아. 넌 진짜 좋은 풍선초였던 거지! 귀엽기까지 하고!”

감동을 하는 건지, 개그를 하는 건지 애매한 순간이었죠.


그렇게 말해놓고는 갑자기 라틴어까지 들먹이기 시작했어요.

“참,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 들어봤어? 다들 그거 되게 멋진 말처럼 쓰는데, 사실 그 ‘카르페’가 말이지, 원래 ‘카르페레’라는 말에서 왔어. ‘열매를 따다’, ‘풀을 뽑다’ 뭐 이런 뜻이지.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루를 따지만… 난 사랑을 따는 거지.카르페 아모렘(carpe amorem)’랄까?”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나름 그럴듯했어요. 그래도 라틴어 자랑은 좀 뜬금없지 않나요.

나도 ‘카르페 디엠’ 정도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어요. 사실 ‘하루를 즐겨라’ 따위의 슬로건은 우리 세계에선 그리 특별하지 않아요. 우리야말로 진정한 카르페 디엠족이에요. 하루하루 무르익는 햇살과 바람 속에서 색이 짙어지고, 그 속에서 서로 미소 짓고,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요. 진짜 ‘하루’라는 감각은 우리에게 배우는 게 맞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오면, 자기도 모르게 행복해지는 거예요. 산소가 짙어져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우리 행복이 미세하게 진동하면서 퍼져나가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산 행복 방출기예요.


“아무튼, 너 때문에 너무 행복해. 처음 만났을 때도 좋았는데, 갈수록 더 그래. 너는 정말 대단해. 응애도 잘 참았고. 이제 열어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친구에게 보여주기로 했거든.”


그러더니 손 위에 있던 풍선을 조심스레 굴려보며, 마치 고대 숨겨진 보물 상자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열었어요.


그 순간, 풍선 틈 사이로 빛이 쏟아졌어요.

ChatGPT Image 2025년 12월 2일 오후 12_17_59.png


사람들은 빛을 다 똑같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빛에도 사연이 있어요. 이렇게 밝은 대낮에도 더 밝게 쏟아지는 빛이 있고, 어떤 빛은 기다림 끝에 나오고, 어떤 빛은 비밀을 품고 있어요. 아주 오래 숨겨졌던 것들이 드러날 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때, 그리고 누군가 처음으로 진짜로 행복해졌을 때, 그럴 때 나오는 빛은 또 달라요. 그런 빛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알아봐요. 사람들 마음이 콩닥콩닥하는 것도 사실 그 빛이 가슴을 두드리기 때문이에요.


쏟아지는 빛 속에서, 희고 검은 작은 것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어요.

처음 세상에 나온 그 친구들은 보글보글 거품 같은 소리를 냈어요.


“어, 여긴 어디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이거 완전 축제 아냐?”

“무서운데… 근데 신나!”


그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세상에 나왔어요. 그걸 바라보는 나도 괜히 뿌듯하고, 조금 찡했어요.


“엄마, 이 모양 좀 봐. 어떻게 이런 모양이 생긴 거지? 진짜 신기해… 누가 이런 걸 그려놨을까?”


다행히도 그 모양이 나왔어요. 그 안에는 내가 견뎌온 계절과 마음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어요. 그것들은 나를 닮았어요. 그래서 더 소중해요. 그동안 너무 고생하면 그 모양이 사라질까 봐, 마음속으로 조마조마했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면 사랑이 지워진다고, 그 모양은 가끔 누락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이제 안심이에요.

드디어 모든 숙제를 마친 것 같은 안도감과 만족감, 그리고 평안함이 뿌리부터 올라와 온몸을 감쌌어요.

마침내 나도 알게 되었어요.

내 시간의 결론,
그건 사랑이었어요.


내 안에 있던 사랑이, 나보다 더 커져서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썩을까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사랑은 영원히 썩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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