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롭게 20] 네가 그 이름을 돌려주겠니?
드라큘라, 장발장,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시대마다 변주되는 고전이 있다면, 그 중심에 반드시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메리 셸리의 소설은 수많은 매체에 적응하며 다양한 형태로 변이와 적응을 반복해 왔고, 각 시대는 자신만의 공포·윤리·정체성의 문제를 이 이야기에 투사하며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왔다. 개인적으로는 2011년 대니 보일이 연출한 연극(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강렬함이 오래 남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희미해질 때마다 다시금 얼굴을 내미는 작품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늘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만든 ‘프랑켄슈타인’ 또한 그 기대를 충족시키며, 휴머니즘의 섬세한 감수성을 탑재한 전혀 다른 괴물을 내놓았다.
죽음을 부정한 창조, 관계를 지워버린 창조주
빅터는 어린 시절, 유일한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병으로 잃는다. 또한 그녀를 살리지 못한 의사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죄책감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평생 지우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긴다. 그 상처는 죽음을 정복 즉, 생명을 창조하려는 집착으로 발전하고, 그는 신의 영역을 넘보는 실험까지 밀어붙인다. 그의 창조는 애초부터 사랑이나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두 번 다시 상실을 겪지 않겠다는 강박에서 출발한 왜곡된 결심이었다. 그래서 그 결과물은 ‘관계’가 아니라 ‘대상’, 즉 ‘그것(it)’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 창조주의 심리가 메리 셸리 자신의 삶과 깊게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셸리는 자신을 낳다 사망한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느낀 외로움, 인정 욕구, 그리고 자식 셋을 먼저 떠나보낸 상실의 경험은 소설 속 빅터의 불안과 공허를 거의 투명하게 비춘다. 그는 죽음을 넘어선 불사조를 창조했지만, 괴물을 정복하고 싶어 하면서도 늘 두려워한다. 유부남 퍼시와 사랑의 도피처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탄생한 이 이야기가 빅터의 고향과 정서적 중심지가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그녀의 삶이 이 소설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갈구하다 죽음을 창조하다
이 창조주는 처음에는 자기 손으로 낳은 아들을 돌보느라 눈도 붙이지 못한다. 말을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쓰며 교감도 시도한다. 하지만 그 노력 자체가 애정이 아닌 자기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었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빅터는 피조물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성을 불태우며 죽음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이 버림은 이후 모든 비극의 씨앗이 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다
하지만 죽음을 모르는 괴물은 산속의 한 가정에서 사랑의 감정을 배우고,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두려움과 다정함이 ‘보여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는 노인을 통해 사랑의 소리로 감정을 전달하는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탄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렇게 그의 미래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지혜로운 노인은 그에게 지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지혜, 즉 상처를 인지한 채로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알려준다. 이 순간만큼은 이야기의 핵심 감정이 선명히 드러난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그는 내면의 두려움과 고통의 근원인 그 기억을 더듬어간다. 그가 붙잡고 있는 유일한 단서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그의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시작점이 된다. 그러나 정체성과 기억의 진실을 마주하는 여정은 그에게 위로가 아니라 파멸을 안긴다. 마치 입양아가 잊고 지내던 과거를 찾는 과정에서, 환상 대신 잔혹한 현실과 맞닥뜨려 더 큰 상처를 겪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결국 자신이 전쟁터의 시신들을 이어 붙인 누더기 존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비참한 진실은 그에게 새로운 탄생이 아닌 또 하나의 죽음을 선사한다.
이러한 ‘진실의 발견이 곧 비극의 시작’이라는 서사는 오래된 비극의 원형이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다가, 결국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당사자라는 끔찍한 운명과 마주하며 인생 전체를 무너뜨린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다, 그 끝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통과 파멸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괴물이 진실로 인해 슬픔과 절망에 잠겨 있을 때, 유일하게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존재가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은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본다. 그의 상처와 다정함, 두려움까지 모두 읽어내며 “당신은 좋은 사람이며, 친구”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그 소중한 만남도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은 그의 마음을 보지 않고 얼굴만 본다. 결국 괴물은 편견의 사냥감이 되어 살인자로 낙인찍히고, 다시 추방당한 존재로 전락한다. 가장 인간적인 순간을 경험한 직후, 그는 다시 가장 비인간적인 현실 속으로 밀려나 버렸다.
나를 닮은 존재를 만들어줘!
괴물은 이어 빅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생명은 있지만 죽지도, 제대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요구, 함께 고통을 나눌 존재인 동반자를 만들어달라는 것. 하지만 빅터는 그 간절함마저 어둠의 번식이라 치부하며 무시한다.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마저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빅터의 오만을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 순간 괴물은 더는 사랑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분노로 자신을 무장한다. 그리고 모든 복수는 여기서 시작된다.
내게 사랑을 허락하지 않겠다면,
난 분노에 탐닉할 거야.
내 분노는 무한하지.
불완전함의 진정성을 알아보는 자
영화에서 엘리자베스는 원작보다 중요한 서사적 축이 된다. 남성 중심의 비극 속에서 그녀는 연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선을 연결하고 관계를 움직이는 핵심 에너지로 그려진다. 전통적 여성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지만, 극 속의 남성을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괴물이 빅터 이후에 처음 말하는 단어도 바로 그녀의 이름일 정도로.
작고 연약한 존재에서 ‘순수함’을 평생 갈망하며 발견하는 그녀는 존재 본연의 모습 순수함, 안정적인 세계 속의 축으로 큰 역할을 하며, 불완전함 속에 담긴 진정성을 이해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순수함 속에서 ‘사랑’을 본다. 빅터가 ‘불완전함’을 차별과 불편함, 증오의 대상으로 보며 타인화했다면, 엘리자베스는 그 안의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 이유’로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앞둔 말은 영화 속에 보석처럼 빛난다. ‘불완전함’을 빅터의 시선이 아닌 엘리자베스의 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화의 주제라면 주제일 수 있다. 불완전함을 외부 기준이 아닌 자기 존재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말이다.
내 자리는 애초에 이 세상에 없었어
이름도 모를 무언가를 찾고 갈망했지
그걸 네 안에서 발견했어.
잃어버리고 되찾는 것, 그게 사랑의 생애야
그 덧없음과 비극 속에서... 이건 영원이 됐어
차라리 이렇게 떠나가는 게 나아
네 눈이 내게 머물고 있을 때
북극에서 마주한 마지막 얼굴
북극 탐험가 월튼의 선실에서 빅터와 괴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다. 괴물은 지치고 무기력하며, 더는 분노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오히려 인간의 진심이 발현된다. 빅터는 처음으로 깊은 후회를 말하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문장을 건넨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여,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걸 생각해
살아있는 동안에 네게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걸,
살아라.
네가 그 이름을 돌려주겠니?
창조주와 피조물을 잇는 유일한 끈인 ‘이름’에 대한 대화는 작품 전체의 철학을 압축한다. 죽음의 문 앞에서 빅터는 그에게 자신만이 세상 전부였을 때, 처음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처럼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내 이름을 불러 다오.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지.
네가 그 이름을 돌려주겠니?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곧 그를 단순한 ‘대상’이 아닌 ‘얼굴’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이는 상대와의 관계와 책임을 수락한다는 선언이다. 이 인정 속에는 상대를 향한 깊은 존중과 애정이 담겨 있다. 마치 김춘수의 시 <꽃>처럼, 이름을 얻는 순간 존재는 무의미한 몸짓에서 의미 있는 꽃으로 피어난다. 괴물은 끝내 이름을 갖지 못했지만, 마지막에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로 부르는 장면은 대상 관계를 진정한 관계로 전환하는 용서의 본질을 보여준다.
따라서 ‘용서(容恕)’라는 단어 속의 ‘용(容)’이 ‘포용하다’는 의미와 함께 ‘얼굴’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상대를 진심으로 마주할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그가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빅터의 이마에 키스하는 행위는 괴물과 인간, 그 모든 경계를 허물고 두 존재를 참된 인간으로 만든다. 결국, 이 작품은 증오와 미움이 남긴 모든 상처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용서임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용서의 끝에서 자유를 발견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빅터의 죽음 후 삶을 선택한 그는 그곳을 떠나며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얼음에 갇힌 배와 선원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미 긍휼을 베풀 경지에 오른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가 밀어준 배가 부서진 얼음 사이를 가르며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복수의 고리’가 깨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어진 선장의 말은 마치 용서를 선택한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듯 크게 울린다.
“자유야! 돌아가자! 집으로 간다.”
용서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자유다. 자신을 묶고 있던 얼어붙은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빛을 향해 걸어가는 괴물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원작보다 한층 희망적인 이 영화의 결말을 더욱 의미 있게 완성한다.
결국,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이 이야기의 모든 비극은 ‘버림’을 용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고, 모든 구원은 그 용서를 받아들일 때 가능해졌다. 삶은 상처투성이일지라도,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자신을 화해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몫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바이런의 말처럼,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감독은 이 마지막 문장을 영화 전체의 미장센으로 풀어낸다. 붉은색의 강렬함과 북극의 푸른 얼음은 삶과 죽음, 분노와 용서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응축하며,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은 그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떠받친다. 특히 노르웨이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엘비에르그 헴싱의 현악은 괴물의 고독과 빅터의 절망, 그리고 둘 사이에 싹트는 마지막 온기를 우아하게 묶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