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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롭게

아호, 나의 아들

[영화롭게 19] 순간을 잡고 길을 정해라

by 리오라
당신은 큰아들을 죽였고, 작은아들은 겨우 돌아왔어.
당신이 도와줬어? 당신이 도와줬냐니까?
‘순간을 잡고 길을 정해라.’
좌우명에 따라 살았어?
그랬으면 당신은 왜 아직 운전 강사야?


마지막, 오열하며 우는 여자와 묵묵히 받아주는 남자, 그리고 하늘로 흩날리는 새 떼까지, 그 장면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나는 언제나 클리셰에 쉽게 넘어가고, 슬쩍 눈감아주는 데 능숙하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또 넘어갔고, 그 덕분에 뭉클함과 눈물을 얻었다.


시험 코스는 정해져 있다. 경로와 속도 이탈은 곧 불합격 사인.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에게 사고만 치는 아들 아호는 눈엣가시다. 액셀 대신 브레이크,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고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기는커녕 더 큰 실수를 불러오는 인생 불합격자. 그런 아들이 늘 못마땅한 아버지는 또다시 사고 친 아들을 선처 한번 없이 단호하게 소년원으로 보낸다. 심지어 늙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으면 좋겠단다. 그러나 나는 그 무뚝뚝함 뒤에 분명 부성애가 숨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아들이 눈앞에서 사라져도 사고의 그림자는 남는다. 임신한 여자친구가 찾아오고, 공범의 아버지가 직장까지 찾아와서 똥테러를 퍼붓는다. 이쯤 되자 아버지가 아들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살짝 고개를 든다.


하지만 늘 이런 집엔 정반대의 아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자랑스러워하는 큰아들은 의대 재수를 준비 중이다. 그는 여러모로 힘겨운 이 집의 태양,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힘내라는 말과 쌓여가는 노트가 그를 점점 짓누른다. 쉼 없이 내리쬐는 삶의 부담 앞에 그는 숨을 곳 하나 없다. 마치 강한 햇볕 아래 그늘 하나 없는 동물원 속 동물처럼, 잠시 몸을 숨길 커다란 항아리조차 없어 타들어 간다. 가족 그 누구도 그의 그늘이 되어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스스로 죽음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큰아들의 죽음 이후 가족은 절망에 빠진다. 출소한 둘째 아호는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새 삶을 다짐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보고 싶은 아들의 부재와 보기 싫은 아들의 존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반면 아호는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숨겨진 부성애가 모습을 드러낼 사건이 찾아온다. 클라이맥스.


순간을 잡고 길을 정해라.
생각도 안 했어. 그냥 액셀만 밟으면 됐거든.


내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차분하게 운전해도 인생이라는 도로가 늘 평탄하고 안전한 건 아니다. 어디서 다른 차가 끼어들거나 가로막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호의 ‘문제만 일으키는’ 친구가 그를 다시 범죄로 끌어들이려 한다. 인생의 관성을 거스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결국 나약한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빨간불에서 계속 액셀을 밟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대신 운전대를 잡는 순간, 그들은 같은 길 위에 선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길 끝으로 돌진한다.

영화의 결말은 한 개인의 성장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이 또 한 번 필요하다. 그것이 이 영화의 씁쓸한 진실이다. 그야말로 ‘어쩔 수가 없다’의 상황에 놓인 그들, 그래서 이 부성애는 따뜻하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놀라울 만큼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다.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빛과 어둠의 대비가 선명하며, 그 안에서 인물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빛 아래에 서 있어도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들은 그들의 숨겨진 심리를 그대로 비춘다. 카라바조가 성경 속 인물을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로 묘사했듯, 이 영화 역시 일상 속 비극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햇볕이 쏟아지는 장면에서도 인물의 얼굴에는 여전히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태양이 세상을 비추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이들이 있음을 시각적으로 완벽히 구현한다. 또한 영화의 원제 ‘양광보조(陽光普照)’, 즉 ‘햇빛이 두루 비추다’ 역시 상징적이다. 햇빛이 모든 것을 비추지만, 동시에 그림자를 만들어낸다는 역설, 바로 그 ‘그림자’의 이야기를 이 영화는 세밀하게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이 빛과 그림자는 인물의 이름에도 들어있다.

주인공 ‘아호(阿和)’의 이름은 ‘화합, 평화’를 뜻하지만, 가족에게 그는 불화와 어둠의 근원이다. 반면 큰아들 ‘아하오(阿豪)’는 ‘굳셈, 용감함’을 의미하지만, 내면은 오히려 약하다. 태양과 그림자, 조화와 갈등이 한 가족 안에서 상징적으로 교차한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이름 ‘아호(영화 속에서는 ‘아허’로 불림)’는 마치 가족의 화합을 끊임없이 외치는 주문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설프고 우스운 순간들이 불쑥불쑥 웃음을 자아낸다. 영어 제목도 ‘A son’으로 읽고 싶게 만드는 ‘A sun’라는 점에서 그 의도가 보여 살짝 웃게 된다. 태양처럼 빛나는 아들일까. 그게 첫째 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 영화는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과 죄의식, 그리고 구원을 그린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프지만, 동시에 회복을 꿈꾸게 한다.


빛이 모든 것을 비춘다고 믿지만,

그 빛조차 그림자를 만든다.

이 영화는 그 잔인한 진실을, 그러나 여전히 희미하게 따뜻한 여운으로 남긴다.













[Zoom in]

- 내겐 항아리도 없고 숨을 곳도 없고 햇빛만 있었지.

- 형은 대단했어요.

- 별문제 없어요.

- 좌우명에 따라 살았어?

- 내가 운전 강사인 거 알잖아. 안 똑똑해

- 아들을 위해 뭘 하고 싶은데 어쩔 줄 몰랐어.

- 그냥 액셀만 밟으면 됐거든.


[음악]

음악 사용은 매우 절제되어 있지만, 비극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복잡한 악기 구성이 아니라서 오히려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

또, 침묵 또한 제대로 영화의 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動物園(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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