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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롭게

리빙: 어떤 인생

[영화롭게 18]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by 리오라

몇 해 전, 대장암 말기 환자가 천 명에게 만 원씩 기부받아 모은 천만 원을 소아암 소녀에게 전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의 몸은 죽어가고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리고 떠나겠다는 그의 눈빛에는 놀라울 만큼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문득 생각한다. 만약 내게 남은 시간이 한 달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물이 터져 나올까? 부정하며 헛웃음을 지을까? 아니면 영화 <버킷 리스트> 속 주인공들처럼, 미뤄 두었던 소원들을 하나씩 꺼내 실행할까? 혹은 보고 싶은 누군가를 찾아갈까?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그 순간부터는 시계 초침 소리가 귀를 찌를 듯 크게 들리고, 1분 1초가 절실해질 거라는 것. 그리고 결국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게 될 거라는 것.



왜 우리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 앞에 서야만 비로소 ‘삶’을 직시하게 될까? 왜 삶의 소중함은 죽음 앞에서만 선명해질까? 여기, 그 질문을 온몸으로 겪어낸 한 남자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 재건으로 분주했던 영국. 런던시청 공공사업부, 거대한 조직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는 한 남자는 겉보기에 점잖은 신사지만, 무기력과 우울에 눌린 채 무심하게 하루를 버틴다. 골치 아픈 일은 미루는 데 능숙하지만, 삶은 즐길 줄 모른다. 동료와 깊은 관계도 없고, 유일한 가족인 아들 내외는 한 집에 살면서도 그를 돈줄로 여긴다.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듯한 삶.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미스터 좀비.’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럽게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했듯, 그는 죽음 앞에서 여러 감정을 겪으며 흔들린다. 처음엔 사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분노를 신사답게 억눌렀을 뿐, 무단결근, 충동적 외출, 돌발행동 속에서 그의 격정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점점 주변을 피하고, 수면제를 모아 죽음을 앞당길 계획까지 세운다. 절망이 그의 삶을 잠식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깨닫는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였음을.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누구였는가? 다른 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때 찾아온 우연. 퇴직한 여직원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기억해내고, 그 생동감을 동경한다. 그녀에게 죽음을 고백하자, 그녀는 그를 위해 울어준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이해받는 순간, 그의 생각은 분명해진다. 그냥 죽음의 부름만을 기다리는 인생은 죽어도 싫다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삶을 바꾸기로. 그는 자존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민원 해결에 착수한다. 그중 하나,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공사에 죽음을 앞당길 만큼 모든 힘을 쏟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향해 가는 그는 그때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사람이 된다. 망가진 놀이터와 같은 그의 삶이 그 완공과 함께 정리된다. 그리고 완성된 놀이터에서, 눈 내린 그네에 앉아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마지못해 죽음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노래하며 죽음을 맞는다.


이 영화의 원작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 작품 <이키루>다. 이 두 영화는 배경은 달라도 구성과 핵심은 같다. 다만, <이키루>는 사회 비판적 시선이 강한 반면, <리빙>은 좀 더 철학적이며 주인공의 내면과 삶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소설 하나가 떠오른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모티브로 삼았다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설 속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법관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옆구리 통증을 시작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까지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했음을 깨닫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하인 게라심을 통해 그는 사랑, 연민, 진실한 관계가 삶의 본질임을 알게 된다.


왜 그의 마지막 일이 ‘놀이터’였을까?

그저 단순한 양심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듯한 삶을 후회했다. 생기 넘치는 여직원을 부러워했다. 놀이터는 아이들의 웃음과 자유,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공간이다. 그는 그곳에 자신이 갈망하던 삶의 모습을 투사한 게 아닐까. 그에게 놀이터는 ‘다시 살 수 있다면 누리고 싶은 삶’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더 놀고 싶어 엄마에게 떼쓰는 아이처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을 원했다. 그래서 놀이터는 그의 마지막 유산이자, 가장 행복한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메아리칠 놀이터에서, 마침내 자신의 생을 완성했다.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은 긴 시간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일지 모른다.

우리는 언제쯤, 고통과 죽음 없이도 삶을 진지하게 살 수 있을까?


만약, 당신에게 한 달이 남았다면?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Zoom in]


- 다른 애들과 못 어울리고 구석에 홀로 앉아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애들 엄마가 부르기만 기다리는 애들요. 그런 애들처럼 생이 끝낼까 두려워졌어요. 정말 그러긴 싫거든요. 때가 돼서 신의 부름을 받을 때요.


[음악]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다. 주인공의 속내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시한부임을 알고 나서 술집에서 한번,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마가목(The Rowan Tree)>을 부른다.


스코틀랜드에서 마가목은 집안에 축복을 불러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마가목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며, 짧은 인생 속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찾으려고 조용히 절규한다.


오! 마가목, 오 마가목

너는 항상 내게 소중해

너는 집과 어린 시절의 많은 인연과 얽혀 있지

너의 잎은 언제나 봄의 첫 시작이었고

너의 꽃은 여름의 자랑이었어

온 나라에서 너만큼 예쁜 나무는 없었지

오, 마가목


https://www.youtube.com/watch?v=8dBvDgXvYWg

The Rowan Tree by Bill Nighy



참고로 <이키루>에서는 1915년 발표된 일본 가곡 <곤돌라의 노래>를 부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PiWqkLaC9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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