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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롭게

체념 증후군의 기록

[영화롭게 17] Life overtakes me

by 리오라
ggggg.jpg by Dacil Velázquez

호르헤 부카이의 책에는 사슬에 묶인 채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코끼리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시절, 작고 연약했던 코끼리는 사슬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 결국 포기했고, 성체가 된 뒤에도 그 기억에 갇혀 더는 시도하지 않는다. 충분히 끊을 수 있는 사슬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오늘날 현실에서도 우리는 그 코끼리보다 더 안타깝고 복잡한 체념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스웨덴에서 촬영된 한 다큐멘터리는 ‘체념 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이라는 낯선 이름의 심리 현상을 보여준다. 몇 개월, 혹은 수년째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들. 대부분 난민 가정의 자녀들인 이 아이들은 음식을 거부한 채 침대에 누워있고, 코에는 영양 공급을 위한 튜브가 꽂혀있다.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이나 반응은 개별적으로 다르지만, 모두 일종의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의사들은 이를 심인성 장애로 보지만, 아직 뚜렷한 의학적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매일 아이의 몸을 주무르고,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시키며 희망을 붙든다. 그러나 회복에 대한 기약은 없고, 집안 분위기 역시 점점 지쳐간다.


이 현상은 대부분 동유럽이나 중동 지역 출신의 난민 가정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전쟁, 박해, 생명의 위협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탈출해 스웨덴으로 망명을 신청했지만, 허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들에게 또 다른 공포와 불안을 안겨준다. 이미 삶의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은 존재의 뿌리마저 흔든다. 이처럼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가 동시에 위협받는 극단적 상황은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에서 말하는 심리적 붕괴의 조건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불안은 감정적으로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과잉 각성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예민해지고, 공격적으로 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의 무기력과 회피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다 감정이 마비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잠에 빠지는 아이들,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쩌면 그런 방법으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의 해소를 체념과 무반응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난민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특히 교실 안에서 조용히 잠에 빠진 수험생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한 피곤함으로 보이지만, 일부 학생들은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잠을 선택한다. 감정의 탈출구이자, 체념의 방식인 셈이다.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안전한 관계, 수용과 공감, 긍정적인 신호 등의 요소들이 심리적 재가동의 단초가 된다. 실제로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에서, 망명 허가를 받은 부모는 그 소식을 조심스레 아이의 귀에 속삭인다. 그리고 매일 반복해서 아이에게 안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 결과 거의 1년 동안 꼼짝하지 않던 일곱 살 소녀는 어느 날만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어난다. 아이는 누워있던 시간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한다. 안전이 보장되자, 감각이 돌아왔고, 주체성이 회복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회복의 순간이 기쁘기보다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 작은 몸이 얼마나 큰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을지, 그 소식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체념 증후군>은
반복된 실패나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절망해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게 되는 심리적 상태로,
‘절망적인 내려놓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대상이 어린아이라는 점. 둘째, 부모의 심리적 상태와 가정의 분위기가 자녀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이 현상이 대부분 스웨덴과 일부 국가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이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심리학은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이 사례는 사회 구조와 제도, 문화적 맥락이 인간의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난민의 서사는 단순한 이동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정체성의 붕괴, 언어와 문화의 소외, 그리고 구조적 무력감이라는 심층적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혹자는 체념 증후군을 일시적이며 과장된 현상이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난민자의 삶, 그 심리적 지형을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의 삶은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불안정한 환경이 인간의 무의식을 어떻게 침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단지 스웨덴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인간적 문제로서 성찰하는 자료로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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