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겸손과 지식의 윤리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래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더 이상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라는 단순한 이상은 유효하지 않으며, 오늘날 우리는 기계가 우리보다 나을 수도 있는 세상을 상상해야만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기술적 진보의 한복판에서 가장 절실해진 것은 바로 ‘겸손’이다. 이 겸손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정보와 권고, 예측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인식론적 태도이자 윤리적 입장이다. 우리는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AI가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델 불가지론(Model Agnosticism)’이라 불리는 새로운 해석학은 그 철학적 뿌리를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고전적 인식론에 두고 있다. 신의 존재를 확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태도처럼, 인공의식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더 정직한 학문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증거 중심적 사유가 가능한 한계를 인정하는 사유의 형태다. 과학은 경험적 증거를 요구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증거는, 어떤 기계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해석 가능한 언어, 놀라운 대화 능력, 심지어 문학적 창의성까지 갖춘 AI라 해도, 그것이 진정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여기서 인식론적 겸손이 다시 등장한다.
철학은 언제나 기술을 늦게 따라온다. 그러나 그것은 느림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할 때, 철학은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AI가 인간보다 정확하게 진단을 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예측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특히 환자의 고통처럼 주관적인 경험 앞에서, AI의 수치화된 판단은 어떤 윤리적 무게를 지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윤리학의 몫만은 아니다. AI가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량화하고 예측의 불확실성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기술이 철학을 내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알레토릭 불확실성과 인식론적 불확실성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 “조정된 신뢰”를 가능하게 하는 AI 시스템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지식의 공동 생산자다. 하지만 우리는 이 파트너가 어떤 기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설명 가능성’이라는 기술적 테마는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LIME과 SHAP 같은 방법론은 복잡한 블랙박스 모델의 예측을 해석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주는 통역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근사치일 뿐이다. 대리모델은 원본의 결정 논리를 단순화하여 보여주지만, 본질적 복잡성은 결코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이는 곧 ‘근사적 이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이어진다.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특정 목적에 “충분히 진실한” 설명을 받아들인다. 과학도, 철학도, 그리고 이제 AI 기술도 이러한 근사 위에 세워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기술적 실천이 단절된 논리의 나열이 아니라 철학과의 대화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기술적 모델 불가지론이 블랙박스의 불투명성을 실용적 설명 가능성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라면, 철학적 불가지론은 그 불투명성을 받아들이는 존재론적 용기다. 둘은 결국 같은 지평을 향한다. 지식은 언제나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만이 진정한 지식으로 이어진다.
AI 시대의 교육은 이러한 사유의 방식을 전달해야 한다. AI의 작동 원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우리는 이제 AI가 내놓은 대답을 디버깅할 수 있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 이는 단지 디지털 리터러시를 넘어서, 인식론적 감수성, 윤리적 사유,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AI 지혜’의 문제다. 이 지혜는 기술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AI 시대의 인간됨을 다시 묻는다.
AI는 오늘도 우리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더 정확히 예측하며, 더 설득력 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믿어도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인간만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모델 불가지론은 바로 이 질문의 공간을 열어준다. 그것은 정답을 보류하는 사유이며, 신중함을 미덕으로 삼는 철학이며, 겸손을 기술로 실현하는 미래의 설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