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자유는 늘 거창한 담론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단순하게 무너진다. 군화발이나 탱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기자의 마이크가 아니라 코미디언의 농담이다. 농담은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언어다. 사람들은 분노보다 웃음을 오래 기억하고, 그 웃음은 권위의 가면을 너무나 손쉽게 벗겨낸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가장 먼저 농담을 검열한다.
2025년, 미국에서 스티븐 콜베어와 지미 키멜이 검열당했다. 그들의 농담이 “국가 안보를 훼손한다”는 이유였다. 웃음이 미사일보다 무섭다면 이미 그 나라는 스스로의 안전망을 잃어버린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늘 “자유의 수출국”이라 불렸던 미국이 이제는 “검열의 수입국”이라는 오명을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이 장면은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웃음을 금지하는 방식을 여러 번 체험해왔다. 2024년 계엄령 소동 당시, 정부는 눈 밖에 난 언론을 제압하려하고 시민을 위협했다. 풍자와 농담은 즉시 국가 모독으로 둔갑했고, 웃음은 가장 위험한 행위로 분류될 뻔 했다. 다행히 시민이 단호하게 버텨내어 권력을 꺾었지만, 그 씁쓸한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열은 법과 명령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 세련된 방식은 자기 검열이다. 방송국은 알아서 출연진을 교체하고, 기자는 질문을 삼가며, 플랫폼은 정부의 눈치를 보며 알고리즘을 조정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직접 입을 틀어막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말을 아낀다. 가장 완벽한 검열은 아무도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다. 권력은 단지 분위기를 만들 뿐이고, 나머지는 시민들이 알아서 수행한다.
이때 필요한 마법의 주문이 있다. “가짜 뉴스.” 이 세 글자는 만능 도깨비방망이다. 권력에 불리한 사실은 모두 가짜가 되고, 기자의 질문도 가짜가 되며, 심지어 시민의 분노마저 가짜로 둔갑한다. 그렇게 남는 건 권력의 뉴스뿐이다. 풍자는 사라지고, 비판은 묻히며, 웃음은 국가 안보 위협으로 치환된다. 웃음이 사라진 사회에서 농담을 하는 것은 반역이고, 농담을 듣고 웃는 것은 공범이 된다.
민주주의는 늘 진지한 투쟁의 결과라고들 말하지만, 어쩌면 그건 반쪽짜리 진실이다. 민주주의는 농담이 살아남을 때만 비로소 작동한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건 언제나 진지한 분노보다 가벼운 웃음이었다. 분노는 통제할 수 있지만, 웃음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미디언의 입은 가장 먼저 닫히고, 시민의 귀는 가장 먼저 막힌다. 웃음이 금지되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웃지 않는 사회, 그곳이야말로 진짜 위험하다.
결국 민주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블랙코미디다. 권력은 자유를 지킨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없애고, 시민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지루함과 피곤함 속에서 조용히 침묵한다. 언론은 권력과 광고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가장 중요한 농담 하나를 흘려보내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남는 건 웃음 없는 민주주의라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농담뿐이다.
웃음을 금지하는 사회는 무섭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회는 웃음이 금지되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웃지 않는 사회다. 농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민주주의는 이미 반쯤 죽어 있다. 웃음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값싼 무기다. 권력이 농담을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그 무기의 힘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 무기를 쥘 용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