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본다. 화면 너머에서, 멀고도 이상하게 익숙한 장면들이 흘러간다. 시카고와 포틀랜드에 군이 투입되고, 대통령은 “법과 질서”를 외치며 반란법 발동 가능성을 언급한다. 주지사들은 반발하고, 연방 판사들은 법원의 권한을 주장하며 임시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백악관은 그 모든 제동을 ‘법적 반란(legal rebellion)’이라고 부른다.
그 말은, 법이 더 이상 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미국은 여전히 자신을 민주주의의 본보기로 말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제국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풍경에 가깝다. 오랫동안 외부의 혼란을 교정하던 그 제국이, 이제 내부의 반대자를 향해 “질서 회복”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펼치고 있다.
군 트럭이 도시의 심장부를 지나가고, 대통령은 위기와 혼란을 강조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선언한다. 그러나 수치는 그들의 말을 반박한다. 범죄율은 내려가고, 폭력 사건은 줄어들었다. 위기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기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래야 질서의 언어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들은 낯설지 않다. 나는 2024년 겨울의 서울을 기억한다. 그 잠깐의 두려운 공기가 다시 느껴진다. 다시금 누군가가 “안정”을 말하고, 누군가가 그 말을 믿기 시작하는 그 묘한 순간의 냉기. 그때도 우리는 설마 ‘계엄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진짜 위험은 군대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평온함 속에 숨어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서사는 놀라울 만큼 명료하다. 법을 재해석하고, 언론을 불신하게 만들고, 군의 역할을 확장하고, 반대 세력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다음엔 위기를 선언하고, 그 위기를 통제하기 위한 강력한 권력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 아니다. 계획적이고, 반복적이며, 무엇보다 익숙하다. 권위주의는 언제나 같은 순서를 따른다.
자유를 말하고, 위기를 언급하고, 안전을 약속한 뒤, 침묵을 요구한다.
나는 이 흐름을 담담히 지켜본다. 놀라움보다 느껴지는 것은, 묘한 피로감이다. 세계 어디에서든, 권력은 늘 비슷한 언어를 쓴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언어의 세련됨에 설득당한다. “질서”, “안정”, “국가”, “법의 지배.”
그 단어들은 언제나 옳아 보이지만, 그것이 언제, 누구의 입에서 발화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국의 사법부가 아직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그것은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이 싸움은 법과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와 기억의 문제다. 사람들이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말할 용기를 잃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조용히 붕괴를 시작한다.
한국에서 이 장면을 본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계절을 지나왔다. 거리의 긴장, 공포를 합리화하는 정치의 언어, 그리고 시민의 피로. 그 모든 것이 지금 미국의 뉴스 속에서 되풀이된다. 마치 역사란, 공간을 건너뛰며 같은 장면을 다른 무대 위에 재연하는 것처럼. 그 재연을 보며 나는, 제국이든 신흥국이든 민주주의의 허약함은 다르지 않음을 실감한다. 결국 문제는 체제의 강도보다, 기억의 지속력에 있다.
지금 미국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나라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어떤 허상 위에 서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나라다. 그들의 군 트럭은 제국의 그림자 위를 달리고 있다. 그 그림자 속에는 한국의 겨울도, 헝가리의 여름도, 터키의 밤도 겹쳐 있다. 나는 멀리서 그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한다. 이 모든 일이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두려운 증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