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보르헤스의 백과사전, 혹은 추천할 수 없는 미술관

by 너부리

마드리드의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은 작품의 수준이나 관리 상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소장품은 훌륭하고, 공간은 쾌적하며, 동선은 정갈하다. 그럼에도 이 미술관을 하루 일정의 목적지로 추천하기는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은 관람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미술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라도 미술관이 인간의 잔혹함과 존엄, 신앙과 권력의 역사를 하나의 윤리적 질문으로 수렴시키는 공간이라면, 티센은 그 질문이 생기기 직전의 상태를 끝없이 나열한다. 작품 하나하나는 충분히 힘이 있다. 문제는 그 힘들이 결코 합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를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사고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매번 뚝뚝 끊긴다. 이해가 시작되려는 순간, 전시는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이 미술관은 미술사를 진보의 연대기로 배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안적 서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폭발 직전’, ‘결단 이전’, ‘언어가 되기 전’의 작품들만을 병치한다. 고흐는 아직 폭발하지 않았고, 칸딘스키는 여전히 성실하며, 점묘법은 끝없는 습작 상태에 머문다. 고갱의 〈Mata Mua〉만이 예외처럼 자기 주장을 펼치는데, 그 탓에 오히려 이 그림은 전시 전체에서 이질적인 섬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티센은 퐁피두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퐁피두의 현대미술은 선언과 단절, 제도에 대한 도전으로 구성된다. 관람자는 동의하거나 반박할 수 있다. 보스턴 미술관 역시 백과사전식 구성을 취하지만, 미국 미술을 세계사의 주체로 세우려는 명확한 방향성을 지닌다. 일본의 국립서양미술관 또한 개인 컬렉션에서 출발했지만, 서구 미술을 ‘이해해야 할 교과서’로 체계화한다.


티센은 이들과 다르다. 이곳에는 찬양도, 정리도, 결론도 없다. 미국 미술은 유럽 미술사의 중심으로 흡수되지 않고 애매한 위치에 방치된다. 유럽 근대는 완성으로 제시되지 않고, 항상 가능성의 분기점에서 멈춘다. 이 미술관은 해석을 거부한다기보다, 해석이 완결되는 순간을 집요하게 회피한다.




이 구조는 보르헤스적이다. 중심 없는 도서관, 끝없이 상호 참조되는 색인, 그러나 결코 완성되지 않는 본문. 관람객들 역시 이 논리에 정확히 반응한다. 특정 작품 앞에 몰리지 않고, 다들 어슬렁거린다. 멈출 이유도, 모일 이유도 없다. 감탄은 분산되고, 사고는 리셋되며, 피로만 축적된다.


이런 공간은 관광객에게 불친절하다. 하루를 써도 “봤다”는 감각이 남지 않는다. 대신 “계속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피로만 남는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애초에 관광객을 상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필요할 때 특정 항목을 확인하듯 꺼내보는 곳, 프라도 옆에 항상 존재하며 급히 소화할 필요가 없는 곳. 즉, 마드리드인을 위한 미술관이다.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은 수준이 낮아서 추천할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방향성이 너무 또렷해서 추천하기 어렵다. 이곳은 감동을 제공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관람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미술사를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는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미술관은 성공적이다. 다만 여행자는 그 성공의 비용을 온몸으로 지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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