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3)

by 정서정




지영이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보니 밝은 물색의 조그마한 종이가방이 책상위에 놓여있다. 종이가방 손잡이 즈음에는 앙증맞은 리본까지 장식되어 있다. 설마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납작한 종이상자 하나와 카드 하나가 보인다. 누구의 소행인지 대충 느낌이 온다. 한숨을 쉬고 카드를 열어보았다. 익숙한 필체의 발신자 없는 카드. 역시 예상했던대로다.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 반쯤 찬 종이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는 이것과 비슷한 크기의 종이가방이 서너 개 들어있다. 나는 새로운 것까지 챙겨넣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오후 업무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 아직까지 주인 없는 책상위에 서류무덤 몇 개만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다. 나는 책상 한가운데에 종이가방을 올려놓았다. 더 이상은 보내지 말라는 거절이었다. 나는 상대방이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까봐 책상 위 메모지를 한 장 떼어 메모를 남겼다.


모두 돌려드립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이 정도로 충분하기를 바라며 자리를 떴다. 제발 상식적인 사람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돌아오면서 과거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차가운 겨울, 예비 수험생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아 얼떨떨하던 열여덟과 열아홉의 사이 그 어느 즈음. 매일 저녁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따라붙던 둔탁한 발소리. 내 걸음에 박자를 맞추던 음침한 움직임은 교복이 긴소매에서 반소매로 바뀌고도 한참이나 나를 쫓았다.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술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집 앞에서 마주친 나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그에게 팔을 붙잡혔다.



“왜 맨날 도망치냐고. 내가 해코지 한 것도 아닌데 천천히 걸어도 되잖아.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너 나 무시해?”



공포로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내게 광기어린 눈으로 마구 퍼붓던 그는 결국 내 뺨을 때렸다. 저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는 나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그 남자의 정체가 드러난 건 의외로 동네 미용실에서였다. 그는 옆동네에 오랫동안 살고있는 삼수생이라고 했다. 미용실 사장님은 그 날 엄마가 내지른 고성을 들은 그가 신고당할까봐 몸을 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사장님은 웃으며 덧붙였다. 네가 예쁘긴 예쁜가 보다.



“종이가방 뭐에요? 부장님 선물?”



종이가방을 두고 오는 나를 본 총무팀 진수씨가 내게 다가와서는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에요. 돌려드릴 게 있어서요.”


“아아.”



진수씨는 수긍하는 것처럼 대답했지만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더 묻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있는 것 같은 호기심 어린 표정. 나를 빤히 쳐다보는 진수씨의 눈길이 따갑다. 어릴 때부터 지겹게 받았던 종류의 시선이었다. 떨쳐내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그럴 수 없었던 시선감옥에 염증을 느끼며 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진수씨는 내 미소의 의미를 알아들은 건지 어색하게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게실로 쏙 들어갔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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