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4)

by 정서정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최근 잦은 야근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해 미안하다며 남자친구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일찌감치 퇴근하고 예약한 레스토랑에 가니 야경이 가장 예쁜 자리에 앉은 남자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저런 자리를 예약했을까. 오늘 회사에서 진하게 쌓인 피로가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남자친구가 불쑥 그랬다.



“너는 집에서 결혼하라는 얘기 안 들어?”



이제 만난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단어였다. 결혼. 물론 우리 부모님도 내가 취업을 하고 남자친구가 생기자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를 수시로 떠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으레 하는 소리로 여기고 시큰둥하게 아직 생각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해 본적이 딱히 없었다. 항상 먼 미래의 일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자친구의 입으로 결혼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결혼이 코앞에 닥친 일처럼 느껴졌다.



“나도 듣긴 하지. 왜? 오빠도 그래?”


“나는 벌써 30대 중반이니까 그런 소리 들은지 한참 됐지. 어제도 한소리 듣고 나니까 너도 그런 잔소리 듣는지 궁금해서.”



내가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말했지만 남자친구는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내 눈치를 슬쩍 본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름아. 너는 결혼 생각 있어?”



갑자기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뤄두고 싶었던 인생의 큰 숙제같은 것이 당장 눈앞에 다가와 얼른 해결하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맛있게 먹던 육즙 가득한 고급 스테이크가 단맛 빠진 껌처럼 질겅질겅했다.



“글쎄. 오빠는?”


“나는 완전 있지. 아직 나랑 해주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입맛이 뚝 떨어져서 그런지 내 눈치를 살살 보는 남자친구의 얼굴이 꼴보기 싫다. 은근히 바라는 답을 기다리는 게 느껴저서 더 짜증이 났다.


분명히 만나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남자친구는 그냥 만나고 싶을 때까지 만나보자고 했었다. 아직 20대이니 하고싶은 것도 많고 가능성도 많으니 미래를 정해두지 말라면서.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했던 어른스러운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결혼을 전제하거나 배제하고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사람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보다.



“난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겠네.”



남자친구는 이제 대놓고 실망하는 표정이었지만 별로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남은 스테이크가 아까워서 어떻게든 입맛을 살리고 싶었다. 내가 물을 마시고 야경을 보고 즐거울만한 이야기를 생각하는동안 남자친구는 말없이 스테이크만 집어먹었다. 맛을 포기하고 배라도 채우자는 생각에 포크질을 하다보니 남자친구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뭐가?”



남자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지만 그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삐진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문득 억울하다. 먼저 내 기분을 망친 게 누군데. 나는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기껏 레스토랑에 와서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데 배도 채우지 못한 채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내 찜찜한 기분으로 대충 저녁식사를 끝낸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식당을 나섰다. 해가 지고 깜깜해져서 그런지 아까보다 조금 더 추운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남자친구는 자동차 시동을 켜며 물었다. 나는 과로에 시달린 사람처럼 축 쳐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집에 갈래. 피곤해.”



오늘 하루종일 했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유쾌한 저녁식사는 아니어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레스토랑에 발을 들일 때 느꼈던 행복감은 온데간데 없고 지친 회사원1만 남았다.



“그냥 간다고?”



내 말에 남자친구는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응. 나 이번주 계속 야근했더니 영 피곤해서 안되겠어.”



피곤에 찌든 내 얼굴이 보이기는 하는건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남자친구가 버럭 화를 냈다.



“너 진짜 이기적이다. 내가 오늘 레스토랑이랑 호텔 잡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냥 집에 간다고?”



갑자기 발끈해서 큰소리로 소리치는 남자친구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났지? 그의 감정이 이해되기도 전에 그 말에서 찾아낸 거슬리는 단어 하나.



“호텔? 오빠 호텔 잡았어?”


“…….”


“뭐야. 왜 마음대로 호텔 잡았어? 아무 얘기 없었잖아.”


“레스토랑 갔다가 분위기 좋게 호텔까지 가려고 그랬지. 내일 토요일이라 회사도 안 가니까.”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해진 나는 제멋대로 계획을 정한 남자친구를 탓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집에 가서 얼른 눕고 싶을 뿐이었다.



“미안해. 근데 오빠, 나 정말 피곤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집으로 갈래.”



물먹은 솜처럼 조수석에 기대 눈을 감는데 바람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희미하게 들린 말소리가 내게 남아있던 마지막 에너지까지 쥐어 짜낸 것 같았다. 고막을 찢을 것 같은 높은 소리가 귀를 타고 머리 전체에 울려퍼졌다. 일 년이나 만난 남자친구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렇잖아. 오늘 너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너 원래 안 이랬잖아.”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할 새도 없이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얼른 그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망치듯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방향도 보지 않고 불빛이 있는 쪽으로 마구 달리는 내 등 뒤로 발악과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아름! 어디 가!”



어디라도 좋았다. 지금은 그의 옆이 아니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망쳤다. 그에게서 숨고 싶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기억에게서.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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