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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시간 좀 내줘요.
업무와는 전혀 관련없는 내용의 사내메신저를 확인하자 한숨이 나온다. 과장의 메시지다. 꽤나 익숙한 상황이었다. 누군가 맥락 없이 대뜸 나에게 시간을 내달라 부탁하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나를 불러낸 남자애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자 대단한 용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비장하게 나를 불러내는 남자애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애들은 어김없이 나를 좋아한다고, 그러니 사귀자고 고백을 해왔다.
못본척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이미 메신저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과장에게 메시지 확인 알림이 갔을 테지.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답장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십 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과장이 재차 메시지를 보내왔다.
6시에 퇴근하고 지하 3층으로 와요.
무응답을 긍정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이 착각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주어야 할지. 의기양양한 과장의 표정을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하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부장이 같이 점심을 먹자고하더니, 퇴근할 즈음이 되어서는 과장이 퇴근하고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이렇게 재수가 없는 날이 그렇게 흔하지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걸까. 엉뚱하게 부장과 과장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부장은 점심면담을 핑계로 회사 근처 횟집에 나를 불러냈다. 일본식 횟집 특유의 다다미방에 자리를 잡은 부장은 딱히 내 취향을 고려하지는 않는지 런치 코스요리를 2인분 주문했다. 친절한 종업원이 반찬과 전채요리를 차리고 자리를 뜨자 가벼운 안부만 주구장창 묻던 부장이 본론을 꺼냈다.
“내 책상에 선물 다 모아서 갖다놨던데.”
부장은 곁들임으로 나온 생선구이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나는 목을 옥죄는 답답함과 불편함, 그리고 앞으로 나올 말에 대한 긴장감으로 굳어 뻣뻣하게 대답했다. 부장은 내 태도가 별로 마음에 안드는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거 다시 가져가. 그냥 받아도 돼. 단순한 선물이야.”
“받고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런 선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식당까지 오면서 생각해뒀던 말을 다다다 쏟아내자 부장은 조금 허탈한 듯 허허 웃었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말이 없다. 종업원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고 생선회를 가져다주는 동안에도 나는 1분 1초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무겁고 커다란 바위에 깔려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종업원이 나가자 나를 흘끗흘끗 넘겨다보는 부장의 시선이 징그럽다. 살갗 위로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 소름이 쭉 끼친다. 나이도 스무살 이상 많고 직급도 까마득한 부장이었다. 게다가 겉으로는 화목해서 깨가 쏟아질 것 같은 부인과 두 아들까지. 여러모로 생각해도 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내가 없을때를 골라 선물을 두고 간 저의가 지나치게 불순하다.
“비서실 일도 마다 않길래 야망이 좀 있는 줄 알았더니. 별로 그렇지는 않나봐?”
가지런히 놓인 회를 한 점 집으며 부장이 말했다. 나는 선물과 야망이 무슨 관계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부장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억지로 웃던 표정마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선물을 받아준다면 회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줄 수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선물을 받아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면 나중에는 어디까지 요구하게 될까. 나는 잘못걸렸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잘 생각해 봐.”
나는 점심을 한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텅 빈 배로 사무실에 복귀했다. 잘 생각해보라는 말에도 싫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덜컥 겁이 났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에서 업무가 아니라 이런 일 때문에 괴로울 줄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부장과의 불쾌한 점심식사를 떠올리자 엉켜서 꽁꽁 묶여버린 실타래가 가슴에 눌러앉은 것처럼 답답하다. 나는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것 같은 기분에 명치 부근을 문지른다. 컴퓨터 작업표시줄 시계는 벌써 4시 47분.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 뿐이다. 하지만 깜빡거리는 메신저 알림에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목덜미가 뻣뻣한 느낌이더니 금방 두통이 도진다. 메신저를 확인하지 않고 삭제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깜빡이는 아이콘을 클릭했다.
대답이 없네. 확인한 거 맞죠?
나는 이번에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써지지 않는 거절 메시지를 꾸역꾸역 쓰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이대로 과장이 순순히 수긍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