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a Fluorescent Lamp

너는 완벽한 태양이야. 근데 사실 나 너 같은 애 별로 안 좋아해.

by 리리

*맨 아래 세 종류의 음악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들으며 읽어주시면 더 좋아요♡



새벽 5시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가 루틴으로 꽉 채워져 있다. 유산균 챙겨 먹기 같은 자잘한 일부터 그림책 내용 구상하기와 같은 굵직한 일들까지, 무려 33개의 데일리 퀘스트. 이들을 해결하는 데에만 하루가 훌쩍 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서른네 번째의 데일리 퀘스트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한 손엔 늘 연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림이든 글이든 무언가를 끄적이느라 늘 정신이 없는 아이였다. 덕분에 집에는 손때 묻은 연습장이 산처럼 쌓였다. 딸의 글과 그림이 가득한 걸 보고 엄마가 차마 버릴 수도 없어 곤란하다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웃음 속엔 얘가 커서 뭐가 되려나 하는 약간의 기대도 들어있었겠지. 그리고 내가 커갈수록 기대와 곤란함은 뒤섞이어 걱정으로 변했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일에 잘 몰두하지 못하고, 남들처럼 나이에 맞는 퀘스트들을 잘 수행해내지 못했다. 대입, 자취, 취업, 연애와 결혼 등 남의 집 딸래미들은 알아서들 척척 해내오는 것들을, 엄마의 못난 딸은 늘 방구석에 처박혀 연습장을 더럽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냥 찾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 그래서 소설을 써보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배워보기도 하고, 만화를 그려보기도 했다. 사진을 찍기도, 영상을 기록하기도, 음식을 만들기도, 기타를 잡기도 했다. 단순히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알아내기 위해.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애석하게도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정답은 아니지만 부분점수 정도는 줄 수 있는 애매한 무언가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서른네 번째 데일리 퀘스트다. 그건 바로, 가사를 쓰는 일이다.


가사를 쓰기로 마음먹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나는 매일 밤마다 일기를 쓰는데, 특유의 자기 비하적 성격 때문에 찝찝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자진해서 찝찝함을 만끽하려는데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렸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내게 있어 '형광등'은 오랜 시간 정리되지 못한 생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일찍이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큰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헤매는데 지친 나와 정반대인 그들은 항상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커다란 무대가 아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어도 그저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에 몰두한 그들은 어쩜 그리 환하고 아름다운지.

처음엔 그 힘에 매료되어 친구나 팬이 됐었는데, 왜 나는 그들처럼 될 수 없는가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동경은 질투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홍대에서 버스킹을 구경하게 됐다. 체구가 엄청 작아서 기타를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여자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작은 손이 참 현란하게도 현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노래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약간의 불편함은 요만큼의 방해도 되지 않는 듯했다. 노래 사이에 멘트도 해줬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많지 않네요. 뭐, 괜찮아요. 저 지금 너무 재밌어요!'하고 환하게 웃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일순 그 여자 밖에 안 보였다. 그 여자 목소리 밖에 안 들렸다. 세상에 나와 그 여자만 남겨진듯했다. 마치,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꿈이 있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빛을 퍼뜨리고 다닌다.


진심이 가득 담긴 맑은 웃음이 예뻐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도망가듯 근처 액세서리 가게로 들어갔다.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진정될 때 즈음, 위에서 '지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갈 때가 됐는지 작게 깜빡이는 형광등이 보였다.


'아··· 깨버리고 싶다.'


그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세상 모든 빛나는 것이 싫어지던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반짝이는 형광등까지 깨고 싶어질 정도로. 여전히 빛나는 사람들이 부러운 건 매한가지지만 더 이상 저렇게 폭력적(?)인 생각은 안 한다. 하지만 지금도 형광등 불빛을 볼 때마다 묘하게 죄를 지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들기는 한다. 이 마음을 언젠가 글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가사라는 형태가 될 줄은 몰랐지만.


사실은 그날 일기에 써 내려가려 했지만 또 자기 비하가 가득한 글로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가사였다. 길어봤자 5분 안의 이야기로 끝내버릴 수 있는, 그래서 자기 비하도 길어봤자 5분 안에 강제로 끝낼 수 있을 터인 노래 가사. 맞다. 딱히 대단한 계기나 엄청난 깨달음이 나를 이끈 건 아니다. 정답까진 아니고 부분점수 정도는 줄 수 있겠다는 말로 밑밥을 깐 이유가 다 있다.






'형광등을 깼다.'

제일 쓰고 싶었던 문장이다. 하지만 원래의 뜻을 아는 이상 너무 기분 나쁘게 들려 방향을 틀었다.


형광등 = 꿈을 가진 반짝이는 사람들 (X)

형광등 = 불안정한 빛, 곧 나 (O)

흔들리는 불빛마저 질투했던 내가 막상 가사 안에서는 그 흔들리는 불빛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뭔가 레벨 업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뭐, 가사를 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시점에서 맞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사는 기왕 쓰는 김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 세 가지 버전으로 제작했다.


한국어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봤는데 그냥 예쁜 단어만 나열된 문장뿐이라 한숨이 푹푹 나왔다. 보기에만 예쁜 글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닌데. 다시 마음먹고 한 글자 한 글자 진심을 담으려 노력했다. 조금 예쁘지 않아도, 덜 세련되어도 그저 나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도록. 물론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담는 건 꽤나 괴로운 작업이었다. 나의 어두운 면과 똑바로 마주해야 했고, 그 모습을 남들에게까지 보여줄 수 있는 각오를 다져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결과물은 만족스럽다. 내 찌질함이 제대로 담겨있다. 히히.


기본이 될 한국어 가사가 완성되고 나니 일본어 버전은 금방 쓸 수 있었다. 그림자를 뜻하는 影(그림자 영/발음 : 카게)를 2절에서는 陰(그늘 음/발음 : 카게)로 바꿨다. 같은 발음이지만 두 단어는 조금 다르다. 1절은 빛나는 그들을 태양으로 보고 말 그대로 내 등 뒤의 그림자가 길어진다는 뜻이었기에 影가 적절했다. 2절에서는 흔들림까지 춤으로 보이는 완전무결한 그들의 찬란함에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 넓어진다, 혹은 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다는 뜻이었기에 陰가 적절했다. 이 부분은 번역을 하며 바로 떠오른 부분이다.


영어는··· 하아, 영어가 진짜 제일 어려웠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내게 모어(母語)이기에 어떻게 쓸지만 고민하면 됐는데, 영어는 이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야 했다. 너무나도 비루한 영어 실력 탓에 사전, 번역기, 문법책까지 더블 체크, 아니 트리플 체크가 필요했다. 형광등이라는 단어 자체도 처음 보았다. Fluorescent Lamp(플로레센트 램프)라니 발음부터 어렵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아예 어려운 단어들로 가사를 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걸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는 건 아니고 실수를 만회하고자 하는 행동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어제 술을 진탕 마셨으면 오늘은 하루 종일 굶는다던가, 어제 루틴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오늘 루틴을 두 바퀴 돌린다던가. 당연히 배가 고파 짜증이 나고 졸려서 책상 위에 머리를 박기도 한다. 그럴 때면 오히려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게는 익숙한 패턴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넌 자기 자신한테 벌주는 걸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발음이 어려운 단어들로 가사를 구성할까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내 감정을 담은 노래지만 이 감정조차 쉽게 토해낼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어려운 발음을 가득 넣어보자는 의도였다. 쉽게 말할 수 있다면 단조로운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입밖에 내기조차 쉽지 않은 가사를 통해 마치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가는 것 같은 노래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사전을 뒤져가며 flawless pristine, light luminescence, unblemished, bright glaring, flicker oscillate 같은 단어들을 정리해 보았다. 다시 보니 참 대단하다. 애초에 무슨 자신감으로 영어 가사를 쓸 생각을 한 걸까. 영어도 못하면서 흔하지 않은 단어에까지 욕심을 내는 나를 보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아 맞아 웃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저 단어들은 거의 다 쓰지 못했다. 의도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겉멋만 잔뜩 든 가사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묻혀버리면 어쩌지? 와 같은 걱정이 들어 결국 그만둔 것이다. 이번에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다른 노래 가사를 통해 한 번 더 시도해보려고 한다.






완성된 노래를 듣고 가사를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마무리 가사는 우울하지만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매일 몇 시간씩 질질 끌던 자기 비하도 5분 안으로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형광등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완벽한 정답을 찾지 못한 채 계속 헤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인생에서 꼭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부분 점수만 채워도 가득 차는 날은 분명 온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노래를 쓰면서.


형광등이라고 불안해 말자. 깨버렸다고 주저앉지 말자. 본디 빛이란 가둬놓는 것이 아니다. 형광등을 깨버렸다면, 그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된다. 딱 한 걸음. 내 방 바깥으로.


그래서 난 이 노래가 누군가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방 안에서 조용히 나 하나를 겨우 밝히고 있을 사람에게.

길어지는 방황에 자책하고 있을 사람에게.

스스로를 미워한 적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세상의 모든 형광등들에게.




*트랙 순으로 노래와 가사를 첨부하였습니다. 즐겨주세요.



01. Just a Fluorescent Lamp (영어)

https://youtu.be/5TkU0FvBVQU?si=unXkuu6LKC1EUrFB


Just a Fluorescent Lamp

-Lyrics by Liry



When you smile

Even the dullest moments begin to glow

Gloomy rainclouds shy away

Startled by your warmth

Yes, You are the perfect sun

But the truth is

I don’t really like days like these

They’re too bright, too blinding

They stretch my shadow far too long


Compared to you, I’m just a fluorescent lamp

Flickering, uncertain

The only one I ever shine on is me

Ziiing—


When you wave your hand

Even time seems to stop and stare

Every tremble turns into rhythm

Every sway becomes a dance

Yes, You are the flawless star

But the truth is

I don’t really like people like you

Of course not

My shadow only grows when I face you


Compared to you, I’m just a fluorescent lamp

Unsteady, blinking

The only place I can shine Is my little room

Ziiing—


People with dreams

Always seem to overflow with light

They cast ripples on quiet, dark lakes

And spill through the gaps in the leaves

Compared to that… I—

So I... let it go

I broke

The fluorescent lamp

Now, I’m nothing like you

I guess I never shone

In the first place


Ziiing—

Ziiing...






02. 蛍光灯(일본어)

https://youtu.be/XFBxAXcH4r8?si=UGDHFpqUn-TvCmUN


蛍光灯

-Lyrics by Liry



君が笑うと悪いときもいいときになる

真っ黒 雨雲も下がってくの

そう、君は完全なる太陽

でも実はね、私、こんな天気 苦手なんだ

明るすぎて 眩しすぎて

私の影が長くなっちゃうでしょ


それに比べて私はただの蛍光灯

びくびく うじうじ

照らせるのはたった一人 私だけ

ああ


君が手を振ると流れるときも止まるよう

なんで君は揺れさえ舞いに見えるの?

そう、君は掛け替えのない星

でも実はね、私、君みたいな子 苦手なんだ

だってさ 私の陰はさ

君の前で長くなるんだもん


それに比べて私はただの蛍光灯

はらはら ぼんやり

照らせるのはたった この部屋だけ

ああ


夢がある人っていいよね

輝きが溢れすぎて

深い湖に光の道を映し

葉っぱの隅にさえ日差しを落すでしょ

それに比べて、まだなにもわからない私はー


ああ、もういいや

もうやめよ

蛍光灯なんて割っちゃおう

最初から私は光らなかったの

そうしとこう

それがいいや

ああ






03. 형광등(한국어)

https://youtu.be/tUpcJlY0Ix8?si=5yEtOtPMdbncpRA3


형광등

-Lyrics by Liry



네가 웃으면 모든 게 꽤 괜찮은 순간이 되는 것 같아

까만 비구름도 아차 싶어 물러나지

맞아, 너는 완벽한 태양이야

근데 사실 난 이런 날씨 별로 안 좋아해

너무 밝아서, 눈부셔서

내 그림자가 길어지잖아


그에 비해 나는 형광등

방황하고 망설이는

비출 수 있는 것이라곤 내가 고작인

아아


네가 손 흔들면 흐르던 시간마저 멈추는 것 같아

흔들림까지 리듬 섞인 춤으로 보여

맞아, 너는 무결한 별이야

근데 사실 난 너 같은 애 별로 안 좋아해

당연하지 내 그림잔

네 앞에서만 길어지니까


그에 비해 나는 형광등

불안하고 깜빡이는

밝힐 수 있는 곳이라곤 내 방이 고작인

아아


꿈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반짝거리더라

빛이 차고 넘치는 바람에

어두운 호수에 물비늘을 만들고

나뭇잎 사이 빈틈에까지 빛을 내리쬐는

그에 비해 나는...


아아, 이젠

그만할래

나는 형광등을 깼어

처음부터 빛나지 않았던 걸로 하자

아아

아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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