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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목 Mar 10. 2019

온몸에 스며드는 상록수 나무향

규슈올레  기리시마-묘겐 코스


   규슈 가고시마로 출발하기 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나름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도착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는 그쳤고 비 소식은 없습니다. 일행들에게 다행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쉽기도 합니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 오히려 좋을 때가 있거든요. 몸이 젖게 되면 걷기는 불편해지고 멀리 보이던 풍경도 사라지지만 경치를 바라보던 시선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끝에 모아져 귀에 들어오는 소리와 호흡에 담긴 냄새에 집중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출발지로 가는 버스에 오릅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천 마을에서 규슈 올레 기리시마-묘겐 코스를 시작합니다. 비로 물이 불어난 작은 계곡을 따라갑니다. 수량이 불어 시원하게 물줄기를 쏟아내는 이누카이노타기 폭포에서는 이를 배경으로 단체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정방향 길을 표시하는 파란색 올레 화살표 방향으로 삼나무 숲에 들어갑니다. 어제 내린 비로 젖은 낙엽이 바닥에 깔려 있고 크게 자란 나무 밑둥치에는 이끼가 한 몸으로 붙어있습니다. 햇빛 사라진 확산광에 숲 속 깊은 곳까지 풍경이 살아납니다. 심호흡 한 번에 상록수 나무향이 온몸에 스며드는군요.



   길바닥은 지난 계절의 낙엽으로 여전히 한겨울 모습이지만 머리를 들면 나무 둥치를 둘러싼 이끼의 연둣빛이 도드라지는 초봄입니다. 비가 내려서 풍경을 잃어야 후각이 살아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밤새 젖은 삼나무 숲은 나무줄기 하나하나가 서로 어우러져 숲의 경치를 잃지 않았음에도 알싸한 들숨의 냄새로 여행자가 발걸음을 늦추게 합니다.



   중3 둘째 딸에게 편지를 씁니다. 둘째에게 숲 속의 모습은 별 호응을 얻지 못합니다. 벌레 비슷한 것에도 아주 겁을 먹거든요. 숲 속을 걷는다면 벌레의 등장을 먼저 떠올릴 것이 뻔합니다. 그래도 편지에 상록수 나무향이 너무 좋다고 적습니다. 숲길을 걷는 맛이 난다고 씁니다. 언젠가 더 자라서 벌레라고 칭하는 범위가 엄마의 기준 정도로 줄어들면 딸아이에게 촉촉한 숲길을 같이 걷자고 말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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