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의 베테랑
지난 3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문이 막혀 몇 달을 침묵 속에 지냈습니다. 웅성거리는 주변의 말소리조차 듣기 싫고 짜증 났기에 깨어있을 때에는 귀에 에어팟을 꽂고 음악을 무한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미각도 고장 났는지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어 한 끼를 먹기도 귀찮았지요. 49재가 지나고 이러다가는 내 우주에서 먼지로 사라질 것 같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결심으로 그동안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말하기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그저 언어를 알고 이기적으로 내뱉는 것과 내가 원하는 말을 전달하면서 효과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들으면서 불필요하게 본인 자랑만 늘어놓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나이를 먹겠지만 무책임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 이야기만 늘어놓아 남을 지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투자를 해달라며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용감한 콜드 콜과 일방적인 스팸문자에 지쳤습니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분명 다릅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는 내실 있는 사람이 돼라 하셨지요. 말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그 사람의 메타데이터(속성정보, 어떤 목적을 가진 데이터, 이력이나 전문 분야 등)를 보는 편입니다. 사실 제 사주로 보면 언어로 먹고산다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덕분에 외국어나 코딩을 배우는 것은 고되지 않고 즐거웠습니다. 배움이 깊어갈수록 글쓰기는 좋았지만 INFJ 성격 때문인지 말하기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쓸데없이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지는 전화 통화보다는 간결한 문자를 선호하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해야 고객 취급을 하는 대면 주문보다는 스마트오더가 편하지요. 엿장수 마음대로 흥정을 하는 오프라인보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민주적인 온라인 마켓이 더 좋습니다. 가끔 내 얼굴과 구매 이력을 기억하는 사장님처럼 부담스러운 사람도 없으니까요. 공중으로 날아가 부서지는 말이 부질없이 느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말하기 책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은 아쉽지만 한 번 읽고 바로 중고서점으로 직행하는 예쁜 쓰레기들이었고요. 대기업 CEO나 군인들을 타깃으로 책장사를 하는 선수는 폼만 그럴듯해 싫었습니다. 10년 경력으로 회장에게 잘 보여 임원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시전 하는 겁 없는 여강사도 있었습니다. 따지고 물었더니 첫인상이 순해 보여서 대충 넘어갈 줄 알았다는군요.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선을 넘어서 무례하게 구는 사람인데 타깃을 잘못짚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타산지석으로 삼고 환불로 너그럽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말하기 분야에서 가장 진실하게 다가왔던 올해의 책 세 권을 꼽으라면 다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윤지 <메타인지 대화법>, 이금희 <우리, 편하게 말해요>, 한국어 전공 박사님들이 공저한 <한국어 능력시험 쿨 토픽>이다. 어머니이자 은혜로 충만한 이윤지 아나운서의 책은 리사 손의 <메타인지 학습법>과 함께 읽으면 금상첨화입니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이금희 아나운서는 EBS 딩동댕 대학교 '낄희 교수'로도 친근하지요. 한국사람이면 한국어가 모국어니 누구나 원어민 수준으로 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어학당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타일러 라쉬 같은 외국인이 유창하고도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겸손해집니다. 평소 말하는 모습을 녹음해서 들으면 참 낯설기도 하고 잘못된 습관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대화의 목적이 사랑이든, 사업 투자든, 공감이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함이라면, 먼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독심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관심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Lisay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