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굿플레이스를 보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굿플레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무척 신선했다. 인간사와 함께 해온 천당과 지옥이야기를 우리에게 생소한 철학과 잘 버무려서 이토록 재미있는 코미디를 만들어 내다니 제작자의 의도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시즌 4로 종영을 한 이 드라마는 평단의 평도 대단히 높게 끝을 맺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미드가 시즌이 계속될수록 진부하고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드라마는 끝까지 '아하' 싶은 에피소드들의 연속으로 그 텐션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도 처음에 보기 시작했을 때는 중간중간 끼어드는 철학적 이야기들로 집중을 잃곤 했다. 때때로 이야기가 너무 산만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왠지 현학적인 이야기로 시청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건가 싶은 반발심도 살짝 들었다. 한데 끝까지 보고 나서 마음에 남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치디를 향한 엘레노어의 사랑'이었다.
주인공인 엘레노어는 지구에 살 적에 정말로 형편없는 인간에 가까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주변사람들의 입장이나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일찍이 이혼한 부모에게서 그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하고 홀로 인생을 살아온 탓에 타인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는 일종의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선한 것을 거부하는 인간이었다고나 할까. 극 중에도 나오지만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열등감이 있었다고 고백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 엘레노어는 굿플레이스(라고 믿고 있는 배드플레이스)에 남기 위해서 치디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에는 고민을 하던 치디는 결국 그녀를 도와준다. 성향도 다르고 이상형도 다르지만 서로를 도우면서 엘레노어는 차츰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엘레노어는 시즌 내내 치디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고 그에 대한 믿음 또한 굳건하다. 치디의 어떤 점이 엘레노어에게 그런 강한 사랑을 주었을까?
나는 그것이 치디가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움에 빠진 엘레노어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치디는 엘레노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녀를 돕는다. 그게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교수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성심성의껏 엘레노어를 도와준다. 단지 엘레노어뿐만 아니라 극 중 인간들, 악마들을 가리지 않고 도울 일에는 최선을 다해서 돕는다. 그 조건 없는 희생과 봉사에서 엘레노어는 사랑을 느낀 것이다. 여러 번의 재부팅으로 다른 버전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엘레노어가 마이클에게 물어본다. 치디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냐고. 802번의 재부팅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마이클은 알려준다. 그 말에 엘레노어는 평소처럼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도망치려던 계획을 바꾼다.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왔던 그녀도 자신을 도와주고, 순수하게 헌신하는 치디를 보면서 나은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어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리더로 변모해 간다.
결국 마지막에 인류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 치디는 자신의 기억을 지워가면서까지 인류와 우주를 구하기 위한 선택을 하고, 그런 치디를 엘레노어는 변함없이 사랑한다. 비록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그 사랑을 돌려주지 않아도 그녀 또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인간은 결국 그런 조건 없는 사랑에 반응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사랑은 화려할 필요도 없고 거창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손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아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절실히 필요한 그 순간에 따지지 않고 그 손을 잡아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타인에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사랑만이 인류와 우주를 구할 수 있는 길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