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장 볼 것처럼 그러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학교를 옮기고 일 년 정도 지나자 나는 차츰 중학교 선생이 되었다. 당혹함과 후회 등에서 늦게나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동료였다. 지금은 스물네 반에 약 예순다섯 분의 교직원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열두 반에 삼십 명도 안 돼서 그런지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유만 있으면 회식을 했고, 때론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회식을 하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뚱한 표정으로 생활하는 내게 먼저 다가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허물없이 대해 주었다. 그런 동료들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학교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가족같이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 속에 하루하루 적응해 나갈 즈음 중간고사로 퇴근을 빨리할 수 있으니 인근의 산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보통 때는 남녀 따로 가는 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다 같이 가자고 했다. 가서 맑은 공기도 쐬고, 계곡에 발도 담그고 맛있는 삼겹살도 먹자고.
시험이 끝나고 우린 식당에서 보내 준 승합차 몇 대에 나눠 타고 식당에 도착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우린 각자의 취향에 따라 산과 계곡을 즐겼다. 다 큰 어른들이, 그것도 학교에선 흔들리지 않는 근엄함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노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재밌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준비된 음식과 술을 서로 챙겨주며 분위기 좋게 모임은 무르익어 갔다. 난 막내로서 선배들이 맛있게, 제때 먹을 수 있도록 고기를 굽고 상추와 고추를 날랐다. 그래도 좋았고 재밌었다.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술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며 가며 들으니 주번교사 문제였다. 당시 주번 교사는 1주일 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하고 또 30분 정도 늦게 퇴근해야 했다. 일과 전 그리고 후에 학급 주번들을 불러 모아 청소를 시키고 청소 상태를 확인하고 학교 문단속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때론 청소 상태로 관리자들에게 불편한 소리로 듣기도 했다. 행정실 직원을 빼고 스물두세 명의 선생님들, 그중에서 부장들을 빼고 열일곱 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하다 보니 한 학기에 한 번 정도만 해도 됐지만, 선생님들은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문제는 부장들이 모두 남자라는 데 있었다. 한 여선생님이 주번교사를 하는데 부장들이 모두 빠지는 것을 웃으며 이야기하다 주변 여자 선생님들, 남자 선생님들까지 가세해 남녀 불평등 문제로 번졌고 급기야 큰 소리로 반말이 오가게 되었다. 난 당황스러웠다.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교를 옮기고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학교에 정 붙이고 사는 게 선생님들이 서로 챙기는 모습이었는데... 그 전의 모습은 다 가짜였나 싶었다. 서로에게 누가 더 상처 주는지 경쟁하는 것 같았다. 몇몇 선생님들이 말려보았지만 결국 여선생님들은 식당 주인에게 이야기해 승합차를 타고 가버렸다. 남선생님들끼리만 남아 조금 더 이어진 술자리는 불쾌감을 못 이긴 선생님 몇 분의 폭음으로 이어져 겨우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요즘 말로 멘붕이었다. 어찌 보면 별 거 아닌 일로 저렇게까지 싸워야 하나? 그렇게 사이좋던 사람들이... 아무리 술 때문이라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저렇게 떠나면 내일 어떻게 서로를 볼 것인가? 막막했다. 이런 학교에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걱정, 내 걱정으로 잠을 설치다 학교에 갔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어제 그렇게 싸웠는데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밤사이 고민하고 걱정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생을 오래 산 최고참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오늘 어떻게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죠?”
“이선생, 사람은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해. 싸웠다고 직장 생활 안 할 거야. 어제 일을 마음속엔 담아두겠지만, 표현한다면 과연 서로에게 좋은 일일까?”
“어떻게든 풀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면 그게 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 급한 해결보단 때론 모른 척하는 것이 더 좋은 해결책이 되곤 해. 이해가 안 되지?”
“네. 전 잘 모르겠어요?”
“조금 더 살다 보면 끝장 볼 것처럼 싸우다 아무 일 없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직장 생활의 노하우라는 것을 이선생도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선생님들에게 너무 실망하진 마.”
어느덧 조금 더 살게 된 게 이십 년이 지났다. 직장생활 노하우를 수 없이 봐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주는 당황스러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거칠더라도 좀 더 솔직하게 살고 싶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