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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iantak Dec 09. 2021

소통하려면 용기가 필요해

리더가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

소통의 시간을 괜히 만들었나?

한 청년이 물었다. “단장님이 저희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서 받은 질문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말해야 공감해 줄까? 나에게 허락된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청년이 나에게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불편하고 불공정하고 이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것들을 아무리 건의해도 답이 없다는 것이다.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지쳐서 이제는 포기상태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적극적인 태도도 이제는 소극적으로 되어버렸다고 하소연하였다. 또 한 청년은 더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 그 청년의 말을 순화시켜서 말하면 “제가 단장이라면 크게 혼내주고 싶습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속으로 당황스러웠다. ‘아! 오늘 이 소통의 시간을 괜히 허락했나?’ 이 정도로 무거운 내용의 대화가 진행될지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으니 용기를 내야 했다. 태연하고 의연하게 일단 들어주었다. 그 청년의 입에서 그렇게 심한 말이 나온 것도 충격이었고, 이렇게 응어리진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 밝게 웃으며 자신 있는 모습으로 지내준 것에 더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소통이란

우리는 소통하자고, 소통해야 한다고 하면서 ‘소통의 시간’을 가진다. 소통이 안될까 봐 건의함을 만들어 설치하고, SNS상 소통창구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는 소통할 준비가 되었다고 만족해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소통창구는 마련해 놓았는데 확인을 안 한다. 제때 안 한다. 건의사항의 쪽지가 전달된 지 1달이 지나도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소통을 한다고 하는 자세인지를 청년들은 묻고 있다. 구호에 그치고, 말과 형식에 그친 죽어 있는 소통의 현실이다. 소통(疏通)의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소통(疏通)을 경상도 방언인 ‘자물쇠’나 소통(小桶, 작은 통)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행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보인다. 그럼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소통의 과정은 먼저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이지 않는 대화이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하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면 이제는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경청 후에는 상대의 마음을 담아서 내 마음을 전하면 된다. 정답 말고 공감이 먼저다. 소통에 서툰 리더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른다. 일단 들어보겠다는 자세가 전부다. 거기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듣는다면 바위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상태로 경청했으면서 소통했다고 생각한다. 경청 후에 반응은 없다. 그 전처럼 똑같이 할 뿐이다. ‘이럴 거면 뭐하러 얘기했지’ 말한 사람은 자괴감이 들뿐이다.      


침묵은 불통의 신호

이런 형태의 소통이 몇 번 반복되면 조직은 조용해진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입을 열지 않는다. 무서운 현실이지만 리더는 그 무서움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아무 말이 없으니 리더가 잘하고 있고, 조직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은 곪아가고 썩어가는데. 그러다가 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면 폭발하고 만다. 물이 100℃가 되면 끓듯이. 다시 소통의 현장으로 돌아가 한 청년의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어떻게 할지.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단지 내 성향상 몇 번 건의해보고 안 받아들여지면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감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나 참고 가기에는 너무 큰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면 그리고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2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것이다. 하나는 더 상위의 상급자에게 건의하고, 또 하나는 내가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했다. 돌이켜 보면 30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나 자신을 위해 참기도 했고, 나 자신을 위해 떠나기도 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면서 심정 토로를 해보기도 했다. 이럴 때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래서 돌이켜 제자리를 지켰던 경우도 있었다. 소통은 참으로 힘들다. 말하는 것도 힘들다. 그렇지만 받아 주는 입장에서도 힘들다. 소통하려면 용기가 필요함을 줄곧 느꼈다.


소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없는 사람은 들어줄 마음의 자세를 갖지 못한다. 들을 수 있는 귀를 닫는다.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과 마주할 시간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듣고 조치해 줄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니 아예 소통을 차단해 버리고 산다. 비겁하다. 겁쟁이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식물의 싹이 트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다가오는 팔로워들의 마음을 거절한다. 그리도 단단한 리더의 마음에도 소통의 싹이 트길 기대하며 기다리는 팔로워들. 그들은 이제 알았다. 소통의 문을 굳게 닫은 리더들에게는 SNS라는 강력한 무기를 써야 된다는 것을. 용기를 내자. 소통하려면 팔로워들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리더가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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