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전 회의에 들어갔다. 책상에는 많은 서류가 있었고, 진행자는 준비된 슬라이드로 한 장 한 장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마치고 계획에 추가 보완할 것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현장을 봐야 답할 수 있겠다고 했다. 나는 가능한 한 계획이 현장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한다. 답은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으로 이동했다. 처음부터 진행 순서에 따라 움직이면서 설명을 들었다. 역시 현장을 보니 몇 가지 보완할 것들이 보였고 이에 따라 지침도 주었다. 나는 회의실에서 논하는 계획을 100% 믿지 않는다. 현장의 2%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철책을 경계하는 최전방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할 때다. 밤새 순찰을 마치고 상황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새벽이었다. 경계근무 중인 초소에서 귀순자를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철책 전방 나무 숲에서 손을 흔들며 귀순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귀순자!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일단 종합판단을 하기 위해 몇 가지 확인을 했다. 그 주변의 감시체계에서는 식별되는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특이 관측 사항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근거리까지 접근했을까? 관측자가 간부라서 신뢰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판단이 어려워 현장으로 직접 가보기로 했다. 차량을 타고 위험할 정도의 속도로 신속히 이동했다. 현장 근처에 도착해서 경계근무자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초소에 도착해서 간단히 보고를 받고 근무자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앗! 정말이었다. 보고 받은 대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여기서만 계속 보고 있었는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측으로 조금 이동해서 동일 위치를 쳐다보았다. 아무 움직임이 없었고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좌측으로 이동해서 쳐다보았다. 역시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최초 위치로 왔다. 지금도 손을 흔들고 있는지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 근무자에게 내가 보았던 방법으로 좌우로 이동해서 쳐다보게 하니 안 보인다고 했다. 불빛이 있었기에 쌍안경으로도 보았다. 역시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이슬 맺힌 나뭇잎만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결국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착각해서 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날이 완전하게 새니 그 모습도 사라졌다. 한 곳을 집중적으로 바라볼 때 나타나는 착시현상이었다. 아마 상황실에서 보고만 받고 판단했다면 귀순자 발생으로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모두를 긴장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간부의 귀순자 보고 사항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현장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게 해 주었던 상황이었다.
지상병담
지상담병(纸上谈兵)이란 말이 있다. 종이 위에서만 병법을 말한다는 뜻으로, 탁상공론만 일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조(趙) 나라 효성왕(孝成王) 7년(BC26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秦) 나라가 조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했고, 양측의 군대는 장평(長平)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조나라에서는 염파(廉頗) 장군으로 하여금 진나라 군대에 대적하게 했으나, 진나라의 심리전에 넘어간 조나라 효성왕은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반대했다. “왕께서는 이름만으로 조괄을 쓰시려고 하는데, 그것은 거문고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 둔 채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다만 그의 아버지가 남긴 (병법에 관한) 전적(典籍, 혹은 저작(著作))을 읽은 것뿐으로 임기응변을 모릅니다.” 그러나 조왕은 인상여의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조괄은 소년 시절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잘했다. 천하에 병법가로서는 자기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조사도 함께 병법을 토론했을 때 조괄을 당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는 아들을 칭찬한 적이 없었다. 조괄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걱정을 하였다. “전쟁이란 죽음의 땅이다. 그런데 괄은 그것을 가볍게 말한다. 조나라가 괄을 장군에 임명하는 일이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 애가 장군이 되면 조나라 군대를 망칠 자는 조괄이 될 것이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출발하기에 앞서 왕에게 글을 올려 아들이 장군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장군으로 삼지 말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왕은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보내 염파를 대체했다. 결국 조괄은 이 전투에서 진나라의 상장군 백기(白起)의 매복 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했고, 무려 40만의 병사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말았다. 입으로만 싸울 줄 아는 조괄의 운명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을 믿지 않는다”
반면에 롬멜은 조괄과는 달랐다. 롬멜이 부하 장교들에게 자주 당부했던 말이 있다. “오늘날 전차부대를 우리는 기병대처럼 지휘해야 한다. 기병 부대장이 안장 위에서 명령을 내리듯, 전차 지휘관은 달리는 탱크 위에서 군대를 통솔해야 한다.” 그는 전선과 멀리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서 각종 정보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본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탁상 위의 전략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또 독일의 패전이 짙어질 때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바뀔 가능성이 없는 현실에서 해결책을 이끌어낼 용기가 없다. 아편에 취한 듯 전쟁놀이에 빠져 미봉책만 즐겨 쓰고, 실패하면 책임을 일선 장군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히틀러를 두고 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으로 간 이유
리더라면 조괄처럼 이론에만 능통한, 그리고 책상 앞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계획 수립만 잘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12척을 가지고 300여 척 이상이 되는 일본군을 맞아 싸워야 했던 이순신 장군. 얼마나 답답하고 현실이 암울했겠는가? 갑론을박을 하며 전장의 현장과 멀고도 먼 조정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오직 승리의 답은 탁상 위의 전략이 아닌 ‘울돌목’ 현장에서 찾은 전략이었다. 답이 안 보이면 현장으로 뛰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