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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iantak Mar 29. 2022

걷는 사람 하정우가 군대에서 행군을 한다면

행군은 인생을 닮았다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 책 ‘걷는 사람, 하정우’ 중에서     
어느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행군을 시작한다. 입동이 지난 11월 중순 어느 날 밤. 장갑 없이는 손이 시려서 견디기 어려운 날씨였다. 이날 밤 걸어야 할 거리는 30km(약 4만 보). 수십 명이 함께하는 야간 행군이 시작되었다. 각자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의 무게만큼 짐을 짊어지고 간다. 그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짓누르며, 출발지점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짐을 벗을 수 있다. 지금까지 천리 행군을 포함하여 많은 행군을 해 보았지만, 할 때마다 힘든 것이 행군인 것 같다. 한참을 걷는데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앞서가는 이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21km 단축 마라톤 할 때와 지금 행군 중 어느 것이 더 힘들어?”

그는 낙동강변에서 언택트 마라톤에 함께 참여했던 4명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는 인생 첫 마라톤 도전이었다. 비록 풀코스가 아닌 하프 마라톤이었지만. 그는 행군이 더 힘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동감이다. 물론 마라톤 할 때와 조건이 많이 다르긴 하다. 마라톤은 주간에 했고, 지금 행군은 야간이라는 시간과 신체 리듬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몸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느냐 없느냐의 큰 차이가 있다. 어쨌든 행군은 힘들다. 발에 뜨거운 열이 올라오고, 평소의 잠 루틴 시간이 되면 눈꺼풀은 점점 무게감을 더해간다. 몸에 지닌 그 어떤 짐보다 무거워지는 눈꺼풀. 그 눈꺼풀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마다 내 몸은 휘청휘청거린다. 강풍이 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미는 것도 아닌데 몸의 균형이 깨질 때가 있다. 이 순간이 오면 ‘누가 대신 걸어 줄 수 없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현실적인 상상의 나래를 펴며 현실을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힘들다. 대열 속에 함께 걷고 있지만 실제는 혼자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 길은 당신의 길이자 당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다. 다른 이와 함께 걸을 수는 있으나, 어느 누구도 당신을 대신하여 걸어줄 수는 없다.’ 그렇다. 지금의 내 걸음을 누가 대신하여 걸을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행군은 인생길과 닮았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함께 걷는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1일 만보 걷기에 도전한다.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 혼자서는 잘 안되는지 만보 걷기 회원을 모집하여 서로 응원하며 도전한다. 걷는 사람 하정우 씨는 걷기 모임 멤버들과 함께 하와이까지 가서 10만 보(약 84km)를 걸었다고 한다. 그들은 걷기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활력을 체험했기에 도전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정우 씨와 걷기 멤버들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걷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행복’은 사라지고 ‘고통’이 찾아온다. 고통을 짓밟고 끝을 향해 걸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이 밤 속에 걷고 있는 자신에게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고통과 지루함 속에 50분을 걷고, 10분간 길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의 무게를 지면에 맡겨버린다. 그런데 심신이 지쳐가고 있을 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길이가 30km라면 나는 어떻게 걸어갈까?’

속으로 답했다. ‘지금처럼 고통스럽지 않게 아주 행복하고 편안한 감정이 내 몸을 감싸 안아줄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할 거야.’

앞만 보고 길만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지나친 멋진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의 여유도 갖고 싶다. 빈 의자가 있다면 잠시 쉬었다 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잠시 대화라도 하는 여유를 보내고 싶다. 내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하고 나니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빨리 가서 끝에서 쉬고 싶어요” 지금의 걷는 고통이 싫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인 것 같았다. 또 한 명에게 물었다.

“최대한 천천히 갈 것이고, 고통의 순간이 느껴지면 최대한 빨리 지나가고 싶어요” 고통이 없는 순간의 삶을 최대한 누리며 살 것이고 살다가 고통이 찾아오면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아마 누구나 이런 마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걷는 사람 하정우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인생에 ‘마지막 4박 6일’이 주어진다면 계속 걷고 싶다고 했을 정도니 아마도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싶다. “내 보폭으로 무리하지 않으면서 그냥 내 팔다리를 움직이며 계속 걸을 겁니다.”      

끝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인생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다. 걷는 중에 행복, 고통, 기쁨의 순간을 맞이한다. 행복과 기쁨의 순간 속에는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는 최대한 빨리 벗어나길 원한다. 그러나 조금 살아보니 이것은 의지일 뿐 쉽게 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는데 그게 말이 쉽지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걷고 있는 이 순간도 애써 ‘걷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은 하면서도 끝만을 보고 갈 뿐이다. 어쩌면 끝에 가서야 그 의미를 깨달을지도 모른다. 걷는 거리가 늘어나자 한 명 두 명 포기자가 생겨났다. 포기의 이유는 다양하다. 갑자기 속이 아픈 사람, 발목을 접질려서 아픈 사람, 피로 골절 등. 반면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도 있다. 절룩거리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내는 사람이다. 포기하라고 해도 계속 걷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걸어간다. 그 정신에 격려와 칭찬을 더해 주었다. 걷는 도중에 고통을 맞이했을 때 포기하는 사람과 계속 걷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걷는 사람 하정우의 마음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내 마음에 다가왔다. “고통의 한 복판에서 포기한 사람들이 어렴풋하게 찾아 헤맨 것은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지만 내가 걷는 길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버티고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걷다가 중간에 먹는 즐거움은 정말 크다. 여행 중에 맛집에 들어간 느낌이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국물이 있는 컵라면과 우동 한 그릇은 최고급 호텔에서 먹는 맛이다. 별과 달이 빛나는 지붕 아래서 몸에 온기가 더해지니 고통은 금세 사라지는 듯하다. 물론 착각일 뿐, ‘온기가 사라질 때쯤이면 다시 고통이 고개를 쳐들고 말겠지?’ 맛의 즐거움도 잠깐, 다시 가야 할 길을 떠난다. 또 걷는다. 행복은 놓고 고통과 함께. 언제쯤 고통은 놓고 행복만 가지고 걸을 수 있을까? 행군을 출발했던 지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어느덧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 고통이 끝나니 놓고 온 줄 알았던 행복이 다시 찾아왔다. 또 해냈다는 행복. 포기한 사람들도 다음에는 고통 뒤에 숨어 따라오는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직 더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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