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落葉)을 밟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때가 되어 떨어진 낙엽은 때론 아름답기도 하다. 또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비록 땅에 떨어져 사람과 짐승에게 밟히고 바람에 날리기도 하지만 그 나름대로 기쁨을 주기도 한다. 낙엽 위를 걸을 때 들리는 바사삭바사삭 소리는 밟혀서 나는 아픈 소리 같지 않다. 그 소리는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가는 마법의 소리 같다. 낙엽길이 좋은 이유다. 그런 낙엽길을 걸으며 출퇴근을 한다. 거리는 짧지만 그 숲길 공간은 일과 휴식을 명확히 구분시켜 준다. 낙엽길을 지나 일의 공간에 들어서면 사각형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더 작은 나만의 일 공간으로 들어간다. 사무실 공간에는 몇 그루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싱싱함을 늘 자랑하듯 서 있는 나무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도 싱싱한 나무의 잎들이 3분의 1 정도가 시들어 있었다. 죽어가는 것인가? 초록빛의 싱싱한 잎들이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한 나무에 3분의 2는 싱싱한데 무슨 일일까? 사무실 공간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출근길에 내가 밟고 왔던 낙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이 잎들은 때가 되어 시들어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싱싱한 청춘의 나이에 갑자기 낙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안타깝다. 미안하다. 역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존재물은 때에 맞게 존재해야 하는가 보다. 이 감정의 파도를 타고 가다 보니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청춘의 안타까운 죽음과 마주했다.
한 청년의 죽음
아침잠을 깨우는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깊은 잠의 세계에 빠졌던 청년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화장실을 가기도 한다. 그런데 오직 한 명의 청년은 일체 요동없이 여전히 자고 있다. 이렇게 시끄러운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수 있는 것일까? 그만의 깊은 잠의 골짜기까지 주변의 소음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 이때 누군가 잠들어 있는 청년을 흔들면서 깨워본다. 지금은 일어나야 할 때라고 귓가에 전해준다. 그래도 그 말이 허공에서 사라진 건지 여전히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제야 불안감이, 무서움이 그 공간에 엄습했다. 갑자기 주변이 분주하고 엄숙해졌다. 연락을 받은 나도 어느샌가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그 공간에 함께하고 있었다. 현장을 보존한 채 헌병과 119의 도착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삶과 죽음의 간별사가 도착했다. 그전에 그 청년의 가족에게도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현장 확인 결과에 대한 발표시간이 되었다. 원인은 알 수 없는 ‘급사’였다. 새벽 2∼3시까지도 함께 근무하면서 보았던 사람도 있었다. 3시간 전에는 웃으며 대화했는데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니 그는 누구보다 충격이었을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도 알 수 없었다. 충격에 휩싸였다. 살아있는 사람도 중요했기에 그에게는 심리적 치료를 받도록 해주었다.
죽음이 가져 온 깨달음
죽음이란 무엇인가? 태어남과 동시에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가 각자의 운명의 순간을 지배하는 것일까? 그 청년은 너무나 모범적이었고 건강했다. 그런데 한순간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간다는 말도 없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다. 정말 허무했다. 이런 죽음은 처음 맞이했기에 너무 당황스럽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 청년의 부모님께도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죄송할 뿐이었다. 그 청년을 건강하게 부모 곁으로 돌려보냈어야 하는 나로서는 무언(無言)의 자세로 지켜볼 뿐이었다. 한동안 울음바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청년의 죽음은 부모님의 가슴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현장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의 마지막 길을 기도로 함께 해 주었다. 이쯤에야 제정신이 들면서 생각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만남이라면?
한 청년의 죽음 앞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던가? 나에게 찾아온 감정은? ‘더 잘해줄 걸, 더 가까이 다가갈 걸,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해 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더‘ 줄 수는 없었을까?’ 후회라는 감정의 지배를 받은 나는 더 슬픔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생전 처음 맞아 본 청년의 죽음 앞에서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 청년의 나이와 비슷했을 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뻔했었다. 물론 내 상황은 그 청년의 죽음과 달리 오롯이 실수에 의한 것이었고,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이 청년의 죽음을 겪고부터 달라진 것이 있다. 나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창조주께서 보살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내 두 눈으로, 두 손발로 그들을 완전하게 지켜줄 수 없기에 오늘도 변함없이 기도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잘해주려고 노력한다. ‘더 할 수 없이’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 사이에 최선을 다한 오늘만이 후회를 멀리하는 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