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기다리던 주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놀러 가고 싶다고 하는데 주말 시간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계획 없어서 시간 돼요”
‘가족과 함께라면,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시간을 내야지’라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퇴근 후 가족과 함께할 즐거운 마음에 여행할 만한 곳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과 맛집도 찾아보았습니다. 딸은 맛집이 있으면 좋아하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몇몇 코스는 자료 캡처를 해 놓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한 금요일 아침, 카톡이 울렸습니다.
“아빠, 우리 학년 확진자 나옴”
“전체 검사받아야겠네? ㅠ”
“오후에 받으러 간디야”
“그럼 오늘 여기 못 오겠네!”
“웅....”(우아와 아앙, 눈물이 쏟아지는 이모티콘과 함께)
얼마 후 아내에게서도 전화가 왔습니다. 딸의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며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이 못 오는데 내일은 뭐 할까?’
풍경이 좋고 책이 있는 카페에서 독서를 할까? 아니면 혼자서라도 여행을? 아니면 누군가와 연락해서 만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기도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깐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2주 후에 계획했던 것, 낙동강변에서의 30km 달리기였습니다. 이것을 오늘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km 하프마라톤 완주를 한 지도 1달이 넘었습니다. 그 후 30km 완주를 위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20km는 언제든지 완주할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었습니다. 3km, 5km를 지속적으로 달렸기 때문이지요.
그날은 날씨도 좋았고, 단풍나무와 핑크 뮬리 등 아름다운 환경을 생각하니 뛰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핫브레이크 3개, 물 500ml 2병을 준비해서 낙동강변으로 출발했습니다. 강변 주차장에 도착해서 핫브레이크 2개, 물 1병과 스마트폰을 휴대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찼습니다. 지난번에 뛰었던 21km 하프코스를 왕복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준비운동을 했습니다. 시속 10km 속도로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며 잘 뛰었습니다.
30km 조금 못 미쳐 시선을 5m 앞 땅에 두고 뛰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오던 할아버지께서 “파이팅” 하고 외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뛰어가다가 갑자기 들린 소리에 얼떨결에 “파이팅”으로 답하였습니다. 뛰는 사람이 뛰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걷는 사람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왔지만 각자의 길을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복장도 뛰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나도 저 나이가 되어도 저렇게 뛸 수 있을까?’ 짧은 물음을 던지며 목표를 향해 계속 뛰어갔습니다.
점점 속도는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1km를 5분대로 뛰다가 이제는 7분 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목표인 30km는 완주를 했습니다. 비록 속도는 떨어져 가지만 아직 힘과 의지는 있고, 차를 주차했던 장소까지는 4km 정도 더 남은 듯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더 가야 하니 그렇다면 풀코스를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계속 뛰었죠. 33km 지점에 이르니 양다리의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스르르’ 무언가 장딴지부터 허벅지로 올라오고 있는 느낌. ‘쥐가 내리려나 보다. 쥐 내리면 끝인데.’ 물론, 오늘의 30km는 달성했으니, 여기서 멈춰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부터는 위기관리다.’ 더 이상 쥐가 나지 않게 일단 걸었습니다. 이때부터 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걷는데 졸리기까지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죠. 준비해 갔던 물과 핫브레이크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의 보급 대책이 없는 가운데 주차장에 있는 차까지 뛰어가야 했어요. 차에 있는 예비 핫브레이크 1개와 물 1병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힘듦’에 대한 감정을 다스리며 천천히 주차장까지 뛰었습니다. 드디어 차량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서 물을 마시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그 맛을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네가 이 맛을 알아?” 이 질문이 오히려 모든 감정과 맛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 듯싶네요. 휴대 주머니에 있는 빈 물병과 교체를 하고 남은 핫브레이크를 한입 물어뜯어 오물오물하는데 꿀맛이었습니다. 이내 힘을 내서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이제 남은 거리는 3km. 평소 이 거리는 자신 있는 거리인데 지금의 3km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심적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코스는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나 홀로 마라톤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코스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 맞는 코스로 재설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많이 있는 주변을 뛰면서 그들을 구경하며 뛰기로 했어요. 핑크 뮬리 공원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는 곳, 게이트볼 대회가 열리고 있는 곳,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있는 곳,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남은 구간의 응원부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완주를 얼마 앞두고 응원단이 생긴 것입니다. 힘이 났죠.
핫브레이크 남은 조각을 입에 물고 당분을 섭취하며 응원단 옆을 뛰었습니다. 웃고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나를 응원해 주는 듯 보였죠.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인데 나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치는 강사의 소리가 들려올 때는 마치 나에게 코치하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천천히, 집중해, 중심 잡아야지”
어느덧, 스마트폰 달리기 앱에서 42km 도착 음성이 들려왔어요. 남은 거리 195m. 스마트폰을 휴대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남은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힘을 냈어요. ‘조금만, 다 왔다. 잘했다. 마지막 10m. 끝이다.’ 이 말들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30km 연습을 하러 나왔다가 42.195km 완주를 하다니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핑크 뮬리 공원 옆에서 솜사탕을 팔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3가지 색상의 솜사탕을 완주 기념 선물로 샀죠. 그리고 핑크 뮬리 사이에 있는 하얀 계단 앞에 섰습니다. ‘맨 끝 계단에 올라가 멋지게 완주 기념사진을 찍어야지. 솜사탕을 들고’ 완주 메달 대신 솜사탕이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께 사진 촬영을 부탁하고 승리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한 손은 손가락 V, 한 손에는 솜사탕. 내 인생의 멋진 포즈가 되었습니다.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마라톤 풀코스. 공식 대회는 아니었지만, 더 큰 보람이었어요.
‘제2회 나 홀로 마라톤 대회’(2021. 10. 30) 왜 제2회냐고 물으면, 제1회는 금강 자전거길에서 하프코스로 뛰었었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마라톤’은 우선 자기 통제가 잘 되어야 해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하고, 의사가 되어야 하고, 트레이너가 되어야 하죠. 둘째는 절제와 인내심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몸에 지니고 있는 물과 핫브레이크 등 에너지 보충제만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이죠.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나누어서 마시고 먹어야 합니다. 셋째, 심리적, 신체적, 자연적 최상의 환경을 선택해서 뛰어야 합니다.
걷는 사람들은 추월하고,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는 추월당하며 뛰었던 시간. 인생의 압축판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고비도 33km 지점일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더 준비해서 사점을 최대한 뒤로 밀어내야겠습니다. 35km, 38km, 40km. 그렇게 인생을 보다 더 안정적이고 도전적이며 아름답게 만들어가야겠습니다. 나 홀로 마라톤은 계속됩니다.
이렇게 마라톤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어요. ‘대단하다. 알았으면 함께 뛰었을 텐데, 혼자 뛰다가 큰일 난다. 다음에는 대회에 나가 뛰길....’ 이런 다양한 반응에 그 사람들의 나를 향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각자의 마음으로 반응해 주니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정식 대회에 나가면 그 분위기는 또 다를 겁니다. 주변 분위기에 심취해서 더 잘 뛸 수도 있고, 아니면 욕심에 걸려 넘어져 중도 포기할 수도 있겠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나 홀로 마라톤’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 스스로 마라톤 코스를 선정하고, 물과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나만의 페이스로 뛸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응원해 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어요. 경쟁하지 않아도 되죠. 때론 뒤따라오는 사람, 앞에 뛰는 사람, 마주 오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모두가 내가 뛰는 코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나의 경쟁자는 아니에요. 각자의 길을 갈 뿐입니다. 나의 경쟁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죠. 내가 정한 목표라는 꿈을 향해 내 보폭으로 내 심장을 느끼며 뛰면 됩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들을 따라 뛰는 사람들은 초보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자기 페이스 조절이 안되고, 남의 페이스를 따라 뛰다가 힘들어 포기하는 초보자. 물론 초보자가 아니어도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오버 페이스에 걸려 실패하기도 합니다. 목표까지 어떻게 뛸 것인가를 고민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소의 짐을 챙겨서 자기만의 속도로 뛰면 됩니다. 중간중간 몸의 변화에 따라 자기 관리를 하며 가면 됩니다. 물을 마실 때인가? 허기를 달래고 열량을 보충할 때인가? 잠시 속도를 늦출 때인가? 걷지 않으면 안 될 때인가? ‘상황판단-결심-대응’의 연속이죠. 나 홀로 마라톤은 인생 100년의 축소판입니다. 그래서 뛰어 볼만합니다.
<그림: DALL-E, 나 홀로 마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