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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곰 Oct 17. 2019

#_죽음이 어리석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설리의 죽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연예인 설리씨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나지만, 부랴부랴 기사를 찾아봤다. 그동안 가장 핫한 아젠다였던 조국장관 사퇴보다 더 오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이유는 그의 죽음이 주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살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자살은 가장 나쁜 행동이라고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삶의 어려운 일들을 몇 번 겪었다. 인생이 힘들다고 죽겠다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 한번은 정말 죽고 싶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자살하는구나 솔직히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고(어쩌면 죽을 용기조차 없었을지도)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이 자랑이 아니듯 죽음도 함부로 탓할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인생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고 말한다. 아니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아픈 사람의 고통은 아파본 사람만 안다. 상실의 아픔은 잃어본 사람만 안다. 누군가 죽음을 선택했다면 죽은 사람의 나약함을 탓하는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참기 힘든 고통을 안고 지냈을까를 공감하는 게 옳다.

나는 설리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그녀뿐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인간은 아주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이 규정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속한 세상이 타인과 같은 세상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세상은 없다. 모두가 속해있는 세상이지만, 저마다 각 개인에게는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의 세상은 천국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의 세상은 지옥의 맨 아랫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세상의 기준을 함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 분노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이 그 분노를 만드는 것인지도 사실 단언할 수 없다. 하나의 이유일수 없고, 수많은 이유들이 화학작용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慰勞)가 아니라 위안(慰安)이다. 위로의 ‘로’자는 일하다, 노력하다, 힘쓰다라는 뜻의 ‘노(勞)’자다. 즉, 지금까지 고생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토닥여주는 게 위로다. 다들 고생한다. 힘들게 산다. 그러니 당연히 위로도 필요하다. 그러나 위로는 그 때뿐이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위로받은 뒤에 편안(安)해질 수 있는 마음이다. 현재도 미래도 불확실한 지금 편안한 행복을 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마음을 알 순 없지만, 혹 이 세상에서는 어디에서도 편안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 누구에게도 위안 받지 못하는 삶이란.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내 눈에 힘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겐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더 많은 포옹이 필요하다. 

경계와 위선으로 계산된 행동이 아닌, 그저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서로의 체온으로 세상을 녹일 작은 배려가 필요하다. 오늘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짧은 편지라도 적어야 겠다.


ps : 설리씨, 그리고 타인에게 공감받지 못하고 삶의 포기한 모든 젊은 영혼 모두

        저 세상에서는 더 편안하고 행복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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