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이해하는 속독은 기어를 1단으로 놓은 채로 시속 120km를 가려고 하는 거고, 제가 실제로 하는 속독은 기어를 6단에 놓고 시속 120km로 달리는 겁니다. 중요한 건 시속 120km를 달리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어떻게 변속을 할 수 있는가예요
자, 이 글 하나로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속독에 대한 완벽한 알고리즘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글을 읽는 방법을 처음 배운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려 합니다.
1) 기어 1단 : 음독의 시작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는 속도는 책 읽기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훈련받은 7살 무렵의 독서방법으로 결정됩니다. 그때의 독서법은 아주 심플합니다.
아이가 처음 책을 접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활자를 읽는 게 아니라,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듣는 경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을 배우고, 글자를 배우면서 처음에는 한 음절씩 익히게 되죠. "가, 나, 다"
받침이 있는 글자를 알게 되고, 음절이 모여 한 단어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책" "엄마" "아빠" "선생님"
그러다 스스로 아주 쉬운 그림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조금 더 많은 활자가 들어간 책을 읽게 됩니다.
이제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선생님이 책을 읽어보라고 시키면 해당 부분을 또박또박 읽을 수 있고, 간략하게 어떤 내용인지 설명할 수 있는 단계가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평균 5년~7년이 소요됩니다.
어릴 때는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은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면서 아이들은 책과 친해진다.
2) 기어 2단 : 묵독의 전환
이제 학년이 올라가고,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설명해 주고, 책에 있는 내용을 읽으면서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제 조금 더 높은 수준의 텍스트를 읽을 수 있게 되는데요.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묵독(silent reading, 默讀)으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시점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리 내어 읽다가 특별한 훈련 없이 묵독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자연스럽게 '하위발성'(Subvocalization)을 하는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하위발성은 '속발음'이라고도 하는데, 책을 읽을 때 마음속으로 소리를 내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하위발성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리 내어 읽는 속도 이하로 책 읽는 속도가 제한되고 맙니다.
3) 기어 3단 : 선택적 발달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며 가장 최적화된 읽기 방법을 자연스럽게 뇌에 각인시켰을 겁니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동물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적응을 해왔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는데요. 책을 읽는 능력도 비슷합니다.
알다시피 학교에 들어가 독서가 공부로 대체되고 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흥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교육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 제한된 환경에서 자신만의 재미와 흥미를 찾게 되는데, 그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아이들은(성인이 된 우리 역시) 시기에 따라 게임, 농구, 배드민턴, 미술 등에 관심을 가지는데, 이렇게 자기만의 흥미영역이 생기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발적인 독서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 독서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동기나 원인은 다 다르겠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어느 특정한 시기에 짜릿한 독서경험이 존재할 겁니다. 그로 인해 지적 호기심, 탐구심 등의 영역이 활성화되며 느껴지는 쾌감(도파민 or 엔도르핀)을 느꼈을 테지요. 즉, 누군가 소설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의 어느 시기에 소설을 읽고 재미와 감동을 느낀 시점이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자기 계발서나 투자책을 시작으로 독서량이 늘여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 역시 책을 읽으면서 그 책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견하거나, 지금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인사이트를 얻게 되면서 본인의 인지여부를 떠나 뇌는 분명 그 행동을 반복할 수 있는 강력한 보상(호르몬)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선택적인 경험은 그 사람의 취향이니 관심사로 이어져서 해당 분야에 대한 선택적 지식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4) 기어 4단 : 선택적 속독
그에 따라 읽기 능력도 선택적으로 발달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번은 아내와 길을 걷다가 버스에 붙어 있는 화장품 광고를 본 적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악마쿠션'에 대한 광고였는데, 제목이 특이해서 '저게 뭐야?' 하고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그랬더니 아내는 1초 정도 슬쩍 그 광고를 쳐다보더니 그 악마쿠션 광고 내용에 대해 단박에 이해하고 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미 그때 어느 정도 속독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평소에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메이크업"이라는 분야에서는 아내가 저보다 월등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저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단어들을 아내는 빠르게 해석하고 바로 설명까지 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이후 제가 개인적으로 정립한 속독인 스키마 독서법의 뿌리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라라베시 악마쿠션 : 이 독특한 이름 덕분에(?) 속독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들은 이미 선택적으로 자신이 충분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글을 읽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속독을 하고 있다.
2) 효과적인 속독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스키마, schema)이다.
자, 다시 말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미 어떤 분야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속독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시 영화관에서 자막을 읽느라고 힘들어서 영화를 제대로 못 본 적 있나요?
외국영화를 많이 안 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현상은 거의 없을 겁니다. 영화를 보면서 자막을 읽을 때는 순식간에 자막이 지나가도 당신은 화면을 보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그 자막을 읽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해당 자막이 화면이라는 배경지식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설령 다 읽지 않아도 화면에서 주는 정보와 자막의 특정 단어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독의 핵심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지, 물리적으로 모든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야구를 좋아한다면, 스마트폰으로 어제 본 야구경기에 대한 뉴스기사를 읽을 때 책을 읽는 것처럼 읽진 않을 겁니다. 제목보고, 초반의 핵심적인 문장들을 이해한 후 빠르게 스크롤하면서 읽을 가능성이 높겠죠. 그것도 분명한 속독의 일종입니다. 사람들은 배경지식이 충분한 분야의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는 훈련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부분적인 속독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5) 기어 5단 : 훈련을 통한 속독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그 부분적으로만 쓰고 있던 속독의 원리를 이용해서 자신이 성장하고 싶은 분야의 책이나 자료, 영상 등을 볼 때도 동일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효과적인 훈련방법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저의 경우 시중에 나와있는 웬만한 속독 관련 도서를 다 읽어 보았고, 실제 강의에 참여해서 훈련도 받아보았지만, 100% 저를 만족시켜 준 책이나 강의는 없었습니다. 이제와서 돌아보면(속독을 할 수 있는 상태) 책에 적혀 있는 말들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인데, 그걸 경험해 보기 전에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였다는 게 함정이랄까요? 마치 건축학개론에서 납뜩이(조정석 배우)가 키스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걸 보면 키스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바로 이해가 되지만, 키스를 안해본 사람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라고 의아해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책을 정말 느리게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권을 읽는데 빨라야 1주일, 늦으면 한 달 넘게 걸리기도 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어느날 얇은 자기 계발서 한권을 5시간 동안 읽어서 하루 만에 완독했을 때, 스스로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게 엄청난 자랑거리가 될 만큼 저에게 속독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 때 속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몇몇 책을 읽어 봤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죠. 그래서 속독자체를 한동안 부정하기도 했고, 그나마 한 달에 1~2권을 읽어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책 많이 읽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속독을 어느 정도 마스터한 후에 속독에 대한 책을 다시 읽어보니,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겁니다. 아마도 그 책에서 설명하는 믿기 힘든 상황들(30분에 한 권 읽기, 10분 만에 책 훑어보기 등등)을 이미 경험했고, 배경지식이 쌓였기 때문일 겁니다. 바꿔 말하면, 속독이라는 것이 일정한 훈련과 경험을 거치면서 몸으로 체득하지 않고서 머리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역시 이보다 더 쉽게 속독을 설명하는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지만,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속독의 원리를 이해하더라도 바로 원하는 책을 속독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머리로 이해되었다고 하더라도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은 10년, 20년 넘게 유지되어 온 것이므로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하위발성(속발음) 단계를 넘는 게 가장 어려울 겁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습관을 들이기 위한 최소단위인 21일~60일 정도만 집중해서 꾸준히 새로운 방식의 읽기 훈련을 한다면 당신도 분명 새로운 세상의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6) 기어 6단 : 속독의 활용 - 제대로 속독하는 사람이 실제로 읽는 법
이야기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속독은 기어 1단으로 시속 120km의 속도를 내는 게 아니라, 기어를 6단에 놓고 120km를 달리는 것이라고 말했어죠. 제가 시속 302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는 포르쉐(718 카이맨 GT4 기준)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로 운전할 때 모든 구간을 302km로 달리지 않듯이 속독을 마스터한다고 해도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속도로 읽는 게 아닙니다.
포르쉐를 탄다고 해서 모든 길을 200km 이상으로 달릴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
포르쉐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식당이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 있는 식당이고, 저는 강남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 집 주차장에서 나올 때는 천천히 서행하다가 큰길에 들어서면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고, 강변북로와 자유로를 타고 일산 쪽으로 가는 동안에는 최대한 빠르게(물론 교통법규를 준수하면서) 이동하고, 호수공원 근처에 가면 다시 속도를 최대한 낮추고 해당 음식점이 어디 있는지 둘러보면서 운전하지 않을까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지요? 책을 속독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속독은 필요할 때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능력이지 모든 구간을 빠르게만 읽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장소를 가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장소에 가는 목적에 따라 운전하는 과정이 달라지듯이 독서 역시 취향에 따라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속독은 제가 정말 애용하는 독서방법 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모든 독서를 속독으로 하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속독을 자신이 원하는 독서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차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걸어가거나 뛰어가는 방법 밖에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차를 알고 운전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걸어서는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불과 몇 분 만에 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국립중앙박물관까지 걸어가면 거리는 4.4km밖에 안되지만, 시간은 1시간 12분이 걸린다. 반면에 자동차를 타고 가면 거리는 6.6km로 늘어나지만, 시간은 12분 만에 갈 수 있습니다.
12분 만에 가기 위해서 차도 필요하고, 운전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기름값도 들고, 심지어 2km 넘는 길을 더 가야 하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차로 이동하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절약되는 1시간의 가치가 그 모든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어차피 99.9%의 사람들이 그런 거 하지 않으니까 속독 같은 거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0.1%)는 책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의미 있는 방식으로 더 빨리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스스로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는 전략과 원칙을 찾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걷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비용을 들여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척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작 자동차의 편리함을 체감한 사람들은 자동차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힘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