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강의를 마치고 도서관 담당자님의 양해를 구하고 강의했던 앞자리 테이블에서 잠시 책도 읽고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강의한 공간은 작은 교실처럼 꾸며놓은 공간이었는데, 강사가 사용하는 테이블만 벽을 등지고 앉는 구조로 되어있었는데요.
강의가 끝나서 제가 앉아있는 책상 말고도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았는데, 한동안 아무도 안 들어오시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왜 그런지 몰랐는데요. 잠시 후 어떤 분이 조심스럽게 들어오시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혹시 여기 이용해도 괜찮은가요?"
"네네, 그럼요. 이제 강의가 끝나서 자유롭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한분이 뭔가 삐죽거리며 문 앞에서 서성거리시기에 저게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편하게 들어오셔서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
상황을 보니, 제가 앉아있는 자리가 앞쪽 스크린 쪽 마주 보고 있는 조금 큰 책상이다 보니 거기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무언가 글을 쓰고 작업하는 제 모습이 마치 그 방의 책임자처럼 보였나 봅니다. 문득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보는 많은 권력은 공간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시선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유현준 교수는 <공간의 미래>에서 공간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 제가 앉았던 자리는 그 방에서 유일하게 스크린을 등진 다른 모든 책상을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고, 결국 그 책상이 가지는 공간의 위상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 방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서있는 자리만 칠판을 등지고 학생들을 향해 있고, 교회의 설교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공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가 그 사람이 가진 무언의 권력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지요.
자리는 중요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조금 다르게 느껴지게 만드니까요.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조직 내에서의 직책에 따라서도 사람은 변합니다. 간혹 높은 자리까지 승진하셨다가 은퇴하신 분들이 매우 빠르게 노쇠하거나 무기력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아마 직장에서의 직책(자리)에 자신의 가치를 너무 많이 투영하신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리가 주는 권력은 내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임대'해 주는 것이지요. 그건 회사의 직책이든, 국가의 직책이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종종 인원이 많은 큰 공간에서 강의를 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면 강사가 서는 자리의 무게는 조금 더 커집니다. 그 자리로 시선이 모이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무게를 감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무척 떨리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요. 그 자리가 주는 힘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맛에 취하기도 할 것입니다. 가수들이 콘서트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와 평범한 나로 돌아오는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약에 취하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의 일이 그런 예라고 하겠습니다. 제 경험상 그 자리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와 영감 등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에게도 그 공간에 모인 사람에게도 모두 유익하기 때문이지요. 그 시선의 권력을 자기를 뽐내기 위해 쓰는 사람은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일 테니까요.
저 외에도 몇 명의 사람들이 더 그 공간을 편하게 이용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제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쓰던 글을 마무리 짓고, 기분 좋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4일 연속으로 강의한 날이라 목도 쉬었고, 체력적으로도 조금 힘든 오후였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흥미로워지는 날이었습니다. 공간의 힘에 대해 더 많은 것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