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처음으로 새벽독서에 지각을 해버렸습니다. 5시 50분에는 사무실에 도착해서 줌에 접속하여 링크를 공유해야 하는데, 눈 떠보니 6시 30분이었던 것이죠. 1차적인 원인은 스마트폰 배터리를 미처 확인하지 않고 자는 바람에 새벽에 꺼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이미 새벽 4시 반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든 시간이 새벽 2시 무렵이었고, 2시간 반만 자고 출근하기엔 너무 잠이 부족할 것 같은 생각에 스마트폰을 충전하면서 잠시 소파에 반쯤 기대어 누웠다가 그대로 2시간을 더 자버렸습니다. 자다 깨서 시계를 보고 어찌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근본적인 이유는 수면부족이었습니다.
새벽독서를 매일 하기 시작한 지 19일째였는데요. 그동안 자는 시간은 이전과 동일하게 대체로 12시~2시 사이였고, 기상시간만 5시로 당겨지다 보니 절대적인 수면시간이 많이 줄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낮잠 자는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낮에는 특별히 피곤하거나 그러지 않았더래서 한동안은 별 무리 없이 제법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 왔습니다.(개인적으로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일출을 보면서 책을 읽는 건 건강에 유익한 방향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요) 다만,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아왔었는데, 어제 아침이 결정타였던 셈입니다. 그동안은 2주 동안 일요일도 습관을 확실히 들이기 위해 같은 시간에 나와서 아침루틴을 했었는데, 오늘은 하루 쉬고 8시 반까지 푹 늦잠을 잤습니다. 늦게 일어나고 아침이 더 개운한 것 또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상입니다. ㅎㅎ
이런 저의 상황을 마치 들여다본 듯 요즘 매일 한 페이지씩 필사하고 있는 책에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성실하다는 것이 상대의 기대나 요구에 모두 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함은 심부름센터가 아닙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무리하지 않습니다.
성실함은 심부름센터가 아니라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무리해서 될 일이 있고, 무리하면 안 될 일이 있는데, 좋은 습관은 결코 무리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확실히 습관이 될 때까지 약간의 저항을 극복하는 건 좋은 자세지만, 무리하는 건 장기적으로 마이너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진정한 성실은 나와 타인에게 무리하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배려든, 노력이든, 성실함조차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다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좋은 단어에 눈이 가려져서 본질을 왜곡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성실하고 묵묵한 스타일이기보다는 그때그때 반짝 성과를 내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성실함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덕목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 자신과 하는 작은 약속들이 자기 신뢰를 만들고, 이렇게 사소하게 일상에서 쌓여가는 자기 신뢰가 삶의 가장 큰 뼈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성실함을 내 것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일들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훨씬 더 자유로워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실함은 삶을 대하는 가장 가치 있는 태도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참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즘 연이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약하게 되면서 해야 할 일은 많아졌고, 다음 달부터 다시 시작할 강의일정이 돌아오기 전에 완료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뭐 그래도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라서 새벽시간은 일하지 않고 오롯이 성장에 집중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뼈대를 세우지 않고 살만 붙여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일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들을 배제하고 급한 일만 처리하는 식으로는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잠을 적게 잔다고 해서 게으르지 않은 게 아닙니다. 게으름의 핵심은 나에게 가치 있는 것에 투자하는 시간보다 그 외의 불필요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친구가 당장 돈을 벌기 위해 잠 못 자가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글을 하나도 못썼다면 그건 제 기준에서 확실하게 게으른 겁니다. 그런 걸 '타성에 젖어 나태함에 빠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아니 누가 봐도 바쁘고 힘들게 살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잖아요. 물론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나에게 없던 시절 저도 수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늘 그렇게 생각했죠. 왜 난 열심히 사는데 삶이 잘 안 풀릴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를 열심히 저으면서 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고 있었던 거죠.
내가 원하는 삶에서 벗어난 상태가 바로 타성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걸 하느라고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게 나태가 아닐까요?
수면부족보다 더 나쁜 것은 성실부족입니다.
성실함은 그 단어 자체에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주나 도박을 열심히 하는 걸 성실하다고 하지 않잖아요. 다시 말해 내 삶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 몸을 축내가며 무리하는 것은 당연히 성실한 게 아니겠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교통비 조금 절약하겠다고 추운 날 버스비 절약하다가 감기에 걸려서 병원비가 훨씬 더 많이 드는 일과 비슷합니다. 돈을 더 효과적으로 써서 수익은 높이고 지출은 낮추는 게 핵심이라면, 때론 택시비가 2만 원 들더라도 약속시간에 일찍 도착하는 게 현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2만 원을 아끼려다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신뢰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실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아무 일이나 열심히 하지 마세요. 성실함과 노력 뒤에 숨으려고 하지 마세요.
나의 성실함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방향이 틀렸다면 과감히 바꿔야 합니다. 내면의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세요. 다른 사람은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보지 마세요.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에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과 내가 서있는 위치가 다르고 가야 할 길이 다르다면 그 방향이 제대로 된 방향일리가 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