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화창한 게 게으름 피우기 딱 좋은 날입니다.
저에겐 오랫동안 말 못 할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아니 비밀이라기보다는 나 자신도 몰랐던 펼쳐보지 않았던 책 속에 끼워둔 쪽지 같은 거랄까요.
그건 제가 엄청난 '게으름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처음엔 저도 내 안에 이런 모습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제법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게 좋습니다.
맛있는 거 먹고 차 한잔 하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영상을 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생각만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옷도 대체로 매번 정해놓은 옷들만 입습니다. 새로운 옷을 고민하는 게 귀찮기 때문입니다.
운전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운전하는 게 귀찮기 때문입니다. 대중교통 타고 가면서 음악도 듣고 책도 보고 영상도 보면서 편하게 이동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이런 저라도 귀찮아하지 않는 게 딱 3개쯤 있는데요.
새로운 책을 만나는 것, 새로운 음식을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저를 아는 일부 사람들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언뜻 보면 누구보다 바쁘고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요.
매일 새벽마다 독서모임을 하고, 글을 쓰고, 낭독에 필사에, 읽은 책을 정리해서 공유하기까지 하니까 마치 엄청 부지런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시면 안 됩니다.
하루는 길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아무리 길어도 3시간 남짓입니다. 요즘은 5시간 정도 자니까 8시간 빼면 하루 중 무려 16시간이 남습니다. 이 시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롭습니다.
물론 회사 일(디자인, 컨설팅)도 해야 하고, 강의도 해야 하고, 일주일에 4일은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도 챙기고 집안일도 해야 하지만, 매일 16시간입니다. 이 많은 시간 동안 제가 게으름 피울만한 시간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물론 정말 바빠서 게으름을 피울 잠깐의 시간조차 없는 날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잠깐씩 게으름을 부립니다.
만약 게으름을 부릴 시간이 계속 없다면, 아마 나는 잘못 살아도 한참 잘못 살고 있는 상태임에 분명할 겁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은 자고, 밥은 먹고, 화장실은 가는 것처럼 게으름도 비슷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얼마든지 잠깐씩 게으름 부릴 시간은 많으니까요.
문득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제목이 제법 인상적이었고, 언젠가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샀는데, 계속 안 보고 있다. 후후. 게으름 피우느라 '게으름을 위한 찬양' 따위 읽을 시간조차 없는 것입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노동은 무조건적인 미덕이 아니며 하루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1935년에 출간된 책치고는 파격적인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철학자들의 생각은 창조적이네요.
4시간이라고 하니 팀 페리스의 <나는 4시간만 일한다>가 떠오르는군요.
이 책은 읽고 좋아서 낭독했었는데, 뒷부분으로 가니 기술적인 이야기들이 많아 나와서 낭독하기에 적합한 느낌이 아니라 관두었습니다. (원래 게으른 사람들은 이렇게 핑계가 많습니다.)
어쨌든, 제목만 보고 하루 4시간만 일하라는 의미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팀 페리스는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책입니다. 시간적, 경제적 자유를 바라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합니다. (단, 이 책을 읽기 전에 '타이탄의 도구들'을 먼저 읽어보면 더 좋습니다. ^^)
오늘은 오전에 강의를 마치고 잠깐 옆 건물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 3권을 빌렸습니다.
강의 마치고 식당에 갔는데,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서 (기다리기 귀찮아서) 그냥 책방으로 오려고 했는데, 혹시나 새로운 책이 있나 궁금해서 가봤더니 읽고 싶은 책을 3권이나 발견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새로운 책을 만나는 건 전혀 귀찮지 않기 때문에 이미 무거운 가방에 3권을 밀어 넣고, 더 무거워진 백팩을 둘러매고 나왔습니다.
나오는 길에 보니 책 읽고 고르는 동안 식당에 줄이 다 빠져서 여유 있게 맛있는 비빔밥도 먹고 나왔습니다.
오후 햇살이 따사롭고 참 좋습니다. 여유 있게 걸으며 게으름 피우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책방으로 가는 차에서 조금 눈 좀 붙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