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by 란이랑

나의 엄마는 만 3살 조그만 아이를 피아노에 앉혔다. 엄마가 혼수로 가져온 검은 업 라이트 영창피아노, 24평 임대아파트의 조그만 거실에 한편에 거인같이 항상 서있던 피아노는 그렇게 나의 작은 손과 마주했다. 엄마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던 시골 소녀였다고 한다. 하지만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난한 그 소녀는 오페라 가수가 어떻게 되는지 알 리 없었다. 단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반 강제로 돈을 벌어야 했고, 음악을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이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어느새 25살에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었다. 음악에 조금이라도 가까이하고자 피아노 조율사 자격증을 땄다. 없는 돈을 열심히 모아 장만한 중고 피아노를 혼수로 가져왔다. 짐이 될 것을 알면서도.


나를 임신을 했을 때 태교로 피아노 협주곡들을 그렇게 많이 들었단다. 그때부터 엄마는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울 작정을 했었나 보다. 음악에 일찍 소질을 보인 나였기에, 엄마는 4살짜리 고운 손을 피아노 위에 얹히고 도레미파부터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음악적 소질을 엄마에게 물려받은 나는 곧장 엄마의 가르침에 따라 피아노를 띵가띵가 했다. 그렇게 엄마는 6살이 될 무렵까지 집에서 이따금씩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엄마는 다혈질에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식 가르치다가 애 망친다고, 계이름의 개념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던 4살짜리 꼬마에게 엄마는 내가 잘 못하면 피아노 위에서 이따금씩 큰 소리를 쳤다. 손이 올라가는 날도 있었다. 발차기가 날아오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계이름 읽는 것을 틀렸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큰 소리로 “왜 이것도 못해?!” 하며 분노의 게이지가 점점 올라가더니 결국에는 분해서 날 마구잡이로 때리다가 날 피아노 의자 밑으로 던졌다. 어린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혼나야 하는지, 왜 맞아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도. 왜 내가 피아노를 처야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아직도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너무나도 억울했기에.


난 그렇게 날마다 공포에 떨며 피아노 위에 앉았다. 너무 어려서 기억이 흐릿한 것도 있지만 엄마에게 피아노 배우면서의 기억은 혼난 기억이 전부이다. 분명히 좋은 날도, 재미있는 날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드디어 6살이 되고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고부터는 엄마는 나를 음악원이 딸려있는 선교 유치원에 보냈다. 엄마도 한두해 나를 가르치고는 이건 아니다 싶으신 게다.


난 그래도 우수한 학생이었다. 피아노도 또래 중에는 잘 치는 편이었고, 앙상블에서 솔로 부분을 맡겨지는 그런 애였다. 솔직히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엄마가 시키니까 한다는 기분이 강했다.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엄마가 너무 무서웠기에. 그렇게 10년을 주야장천 주 5일 피아노 학원을 들락날락했다.


7살 때, 엄마와 학원 선생님 맘대로 작당하고 나를 잘하는 꼬마들은 다 나간다는 호남예술제에 신청을 했다. 소나티네 1번과 7번을 준비했다. 대회를 1달 여 앞두고서는 그 두곡만 반복 연습을 해야 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아노 치기 싫은데 같은 곡을 여러 번 치는 건 너무 고통스러웠고, 한 번도 안 틀리고 완벽하게 칠 수 있어야 하는데 내 연습량으로는 택도 없었다. 대회 당일, 연습도 안 했는데 긴장은 어찌나 되는지 평소보다 훨씬 실수를 많이 했다. 연습을 안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달 뒤에 광주일보에 입상자가 발표되었다. (그땐 인터넷도 없었으니, 신문과 텔레비전이 유일한 정보통이었다.) 당연히 내 이름은 없다. 금상 은상은커녕 입선도 되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엄마 품에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엄마가 그 날 정확히 뭐라고 날 위로해줬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노력도 안 해놓고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그나마 음악원에서 계최하는 연말연시 콘서트에는 레이스 달린 큰 드레스를 입고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하고 피날레를 장식하고는 했다. 꽃을 한 아름 안고 와준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피아노 발표회 날만은 내가 공주님이고 내가 주인공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는 유일하게 앙상블에서 중역을 맡기도 했다. 친구들과 선배 언니 오빠들과 하는 합주는 장대하고 즐거웠다. 솔로를 맡은 책임감에 정말 재밌게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10년간 피아노 치면서 가장 재밌게 열심히 했던 게 합주였던 것 같다.


4학년 때 이사를 함과 동시에 그전까지 다니던 음악원에서 다른 조그마한 동네 학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선 발표회도 앙상블도 없었고, 피아노에 대한 흥미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5-6학년 때는 연습실에 들어가서 연습을 땡땡이치기 일쑤였다. 연습곡을 한번 칠 때마다 동그라미에 사과를 그려야 했는데, 연습은 하지도 않고 한 시간 동안 띵똥 땡똥 하다가 사과 열개를 그려서 선생님께 제출했다. 그러니 실력도 늘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는 학원에서 난 그저 그런 보통 원생이 되어있었다. 레슨비는 한 달에 5만 원, 그 당시 적지 않은 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10년 동안 엄마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정작 딸은 농땡이 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6학년 졸업 때쯤 되었을까, 엄마가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피아노를 계속하고 싶냐고. 그때서야 난 그만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 난 좀 더 일찍 용기 내서 말하지 못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와 나와의 관계는 첫 단추를 잘못 낀 시기를 잘못 만난 애증의 연인과 같은 관계였던 것 같다. 너무 일찍 어렸을 때 만나 싸우기만 엄청 싸우고 헤어진 젊은 연인 같은… 엄마가 처음에 강압적이지만 않았다면 나도 피아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엄마 대신) 피아노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난 엄마 바람대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중학교를 가고 나서야 피아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만둔 것을 후회했다. 계속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드문드문했다. 좀 더 철이 들고서는 엄마가 왜 피아노를 계속 가르쳤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엄마 덕에 전문적인 음악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 점에서는 엄마에게 참 감사하다.


어른이 된 지금 우리 집 거실에는 88 키 전자 피아노가 있다. 지금도 이따금씩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본다. 실력은 형편이 없고, 여전히 연습은 싫다. 그래도 피아노는 좋다. 내 손가락을 직접 움직여 88개의 건반만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신비롭다. 이렇게 나와 피아노와 길고 긴 애증의 관계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