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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Mar 30. 2022

키즈폰, 학생폰, 효도폰

세 종류의 폰 이름에 나타난 흥미로운 포인트


어지간히 쪼잔한,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잘 하지 않는 생각들입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휴대폰 대리점 유리창에 붙은 광고를 보았다. 


"키즈폰"

"학생폰"

"효도폰"


이 세 단어를 보면서 생각난 것을 휘리릭 써본다. 


1. 왜 저 세 가지가 창에 크게 붙어 있는가?


무표(unmarked)와 유표(marked)라는 언어학 개념이 있다. 무표는 쉽게 말해 '디폴트'이다. 유표는 디폴트에서 특정한 자질이 추가되는 경우다. 


어휘상의 무표와 유표는 대개 사회문화적 영향으로 생겨난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은 맥락에 따라 차별적이라 판단되는) 접두사 '여-'이다. '여배우', '여의사', '여승무원' 등등. 이 어휘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배우', '의사', '승무원'의 '디폴트'는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심지어 승무원 중 다수가 여성이어도 '여승무원'을 쓰기도 하므로 단지 다수/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어진 즉, 사회문화적 권력의 문제로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디폴트'를 나타내는 '승무원', '의사', '배우'에는 따로 성별이 지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남성은 디폴트이므로 기표의 뒤로 사라진다. 권력이 무서운 것은 이처럼 투명해지는 마법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를 비판언어학/담론연구에서는 '자연화(naturalization)'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키즈폰"와 "학생폰", 그리고 "효도폰"이 겨냥하는 고객층이 '디폴트 고객'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무표의 고객은 (경제력을 갖춘) 성인이기에 '성인폰'이나 '40대폰'과 같은 광고는 없는 것이다. (물론 타지역에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동네 몇 군데 매장에는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그래서 "키즈폰", "학생폰", "효도폰"이 붙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덧. 본 쪽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경제력을 갖춘 성인'은 기본적으로 한국인 성인을 가리킨다. 그래서 '외국인 휴대폰 전문점'이나 '외국인 휴대폰 개통' 나아가 '중국인 휴대폰 매장'과 같은 유표적 표지가 목격된다. 


Photo by Gian Cescon on Unsplash


2. 그렇다면 세 범주의 폰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위에서 말한 대로 이들은 '핸드폰을 구입할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성인' 바깥의 범주로 개념화된다. 즉, 이 세 범주의 폰을 사는 사람들은 사실 '구입의 주체'가 아닐 확률이 높다. 


아울러 이들은 연령을 범주화한다. 학령 이전의 아동, 학생, 그리고 노인이다. 즉, 이와 같은 분류는 마케팅적으로 의미있다고 판단되는 연령대를 타겟으로 한다.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이들이 실제로 담는 휴대폰의 종류와 기능, 요금제이다. 키즈/학생/효도(의 대상으로 개념화되는 노년층)폰은 성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기와 다른 기종일 가능성이 높으며, 같은 기종이라 하더라도 각각 다른 종류의 앱을 기본으로 설치한 모델일 공산이 크다. 또한 효도폰의 경우 UI 그 중에서도 글자크기를 크게 만들어 판매될 확률이 높다. 아울러 해당 기종에 자주 연계되는 요금제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이들 명명은 서로 다른 기기/소프트웨어/UI특성/서비스 특성 등을 가리키는(index) 기능을 한다. 


3. 세 단어의 형태어휘론적, 의미적 특성은 어떠한가?


우선 세 단어 모두가 조금은 다른 조어방식을 갖고 있다.  


키즈+폰

학생+폰

효도+폰


세 단어 모두 두 단어가 모여 합성어를 이루고 있는데 '키즈'는 영어에서 온 단어이다. 이에 비해 '학생'은 한국어 어휘이다. 마지막으로 '효도'는 앞의 두 단어와 같이 특정 연령대를 직접 겨냥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키즈'가 아닌 '아동'이 될 수 있는데 '키즈'가 쓰였다는 것이다. ('아이+폰'은 가능한 조합이긴 하나 사과회사의 제품 브랜드와 이름이 정확히 겹치므로 선택지에서 탈락한다.) '키즈'가 한국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경우로 (악명높은) '노키즈존'이나 '키즈앱', '키즈용품', '키즈랜드' 등이 떠오른다. ('키자니아'는 '키즈'가 들어가긴 하나 발음상 '키즈'와 달라 '키즈'의 합성어라는 느낌이 좀 떨어진다.) 이렇게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는 '키즈'가 '폰'과 자연스럽게 결합한 것이다. 적어도 휴대폰 매장 담화에서는 '아동폰'은 문자의 형태로 진열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구어 담화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 "애들폰"이라는 말을 쓰거나 "요즘 어린 친구들이 좋아하는 모델"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구어/문어의 대립항도 흥미로운 부분이나 여기에서는 패쓰.)


다음으로는 '학생'이다. 추측컨대 이 단어는 연령상 '청소년'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을 대표어로 쓰면서 학교 바깥의 청소년들을 간단히 배제한다. 물론 '키즈폰', '학생폰', '효도폰'의 글자수를 맞추려는 노력이 있었을 수도 있으나, 단지 '청소년폰'이 한 음절이 길어서 탈락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학생'이라는 단어가 해당 연령대의 소비자를 가리키는 대표어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조어는 '효도+폰'이다. 언급했듯이 '효도'는 특정 연령대가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효도'는 강력한 사회문화적, 가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단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효도'의 대상이 되는 노인층은 직접 호명되지 않고 그저 함의될 뿐이다. 이것은 디폴트로서의 성인집단이 호명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권력이 작동하는 '투명함'이다. 두 번째는 '효도'의 내용에 휴대폰을 구입해서 드리는 일,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 등이 포함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효도'라는 개념 안에는 함께 대리점을 방문하는 일, 기기의 선택, 화면 글자크기의 조정, 요금제 선택, 때로 자동납부를 '효도하는 자'의 계좌로 돌려놓는 일 등이 포함될 확률이 높다. '효도폰'에는 실제 '효도'라고 부를 만한, 혹은 생색낼 만한 행위가 포함된다. 사실 '키즈'나 '학생'의 경우도 비슷한 일들을 수반하지만 유독 고령의 부모에 대해서만 관계적 의미를 담은 '효도'라는 명명이 통용되는 것은 한국사회의 유교적 전통을 드러낸다. 


4. 결론


나는 왜 밥 먹다가 떠오른 일로 식후 수십 분을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지만, 그래도 수업시간에 한 십 분 정도 이야기할 꺼리는 될 것 같으니 만족하기로 한다. 


세 줄도 아니고 열 글자 요약: 제가 이렇게 깐깐합니다(?) 


#linguisticlandscape #언어경관 #언어이데올로기  #장소기호학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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