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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Sep 07. 2020

다시 카호를 생각하다

<블루 아워>,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 글은 영화 <블루 아워><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제였을까. 카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가. 당시 한국에는 네이버 블로그 붐이 일고 있었다. 내가 종종 들락거리던 몇몇 유명 블로그가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들 카고 아이 이후 일본의 국민 여동생으로 불린다는 한 여자아이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귀여우면서도 순수한 외모가 매력적이었던 아이. 나도 그 아이의 사진을 본 순간,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당시 유명했던 카호의 사진들


시간은 흘러 흘러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했던 이들은 지금은 사라진 싸이월드로 옮겨갔다. 싸이월드 세상에서도 나는 카호를 좋아했다. 쓰고 있는 안경을 장난스레 움직이는 카호는 한때 내 싸이월드의 대문을 담당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언제였을까. 남초 사이트에서 카호가 갑자기 역변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카호는 그냥 그대로 나이를 먹었을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카호의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이야기들이 게시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굳이 가져오고 싶진 않지만, 궁금하다면 나무위키(https://namu.wiki/)에 들어가서 ‘카호’라고 검색해보시라. 무슨 문장들이 나오는지.     


한때 “딸을 낳으면 이름을 하범(夏帆)이라고 짓고 싶어”라고 떠들어댔던 나였지만, 카호의 이미지들이 한국 인터넷에 더는 돌아다니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에서 멀어졌다. 카호 한 명에게만 매달리기엔 나는 이미 좋아하는 여성(…)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그러던 카호가 이름(여름 하夏에 돛 범帆)처럼 다시 내 머릿속 수면 위로 떠오른 건 2020년 개봉한 영화 <블루 아워> 때문이었다. <불신지옥> 때부터 주목했던 배우 심은경과 카호가 투탑으로 나서는 여름 영화라니. 이것은 아니 볼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코로나 시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블루 아워>를 보았다. (개인 방역 수칙은 정말 철저하게 지켰으니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결과적으로 <블루 아워>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서늘한 영화였다. 공포영화보다 훨씬 더 공포영화 같았다. 중간중간 아무 의미가 없는 장면에서도 나는 가슴을 졸여야 했다. 단순 여름 힐링 뮤비처럼 홍보했던 홍보사는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이 영화는 죽음과 삶, 그 사이의 경계를 고무줄놀이처럼 넘나든다. 그리고 그 영화의 중심에는 카호가, 그의 연기력이 있었다.



성공한 CF 감독이지만 인생에 허무감을 느껴서 까칠하게만 구는 ‘스나다(카호 역)’. ‘스나다’는 어느 날 무작정 밝기만 한 친구 ‘기요우라(심은경 역)’와 함께 병원에 있는 할머니를 보러 고향으로 떠난다. 하지만 오랜만에 들른 고향은 어딘지 이상하기만 하다. 아무런 가치도 없이 비싸기만 한 골동품을 미친 듯이 사모으는 아버지,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혼자 저녁을 먹는 어머니, 그리고 어릴 때는 친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쁜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는 오빠까지. ‘기요우라’가 내뿜는 밝은 기운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주위를 맴도는 푸른빛은 스산하기만 하다. 카호는 그 스산함을 연기해낸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존재하는, 어쩐지 숨 막히는 분위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게 끌어간다. 나는 이 영화로 카호를 배우로서 다시 보게 되었고 또 카호에게 미안해졌다.


이 스틸컷에 절대 속지 말 것.


그래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나가사와 마사미와 아야세 하루카, 히로세 스즈라는 굉장한 군단 사이에 껴 있는 카호의 이름. 처음 그 포스터를 봤을 땐 그저 카호가 왜 여기 껴 있지 했었는데 <블루 아워>를 보고 나서야 나는 아, 확실히 여기에는 카호가 있어야 했겠구나 싶었다.     


카호가 맡은 ‘치카’는 원작 만화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어쨌거나 주인공은 히로세 스즈가 분한 ‘스즈(일부러 노리고 캐스팅한 게 아닐까!)’고, 이복 언니들 중에서는 큰언니인 ‘사치(아야세 하루카 역)’가 가장 비중이 많으니까. 하지만 ‘치카’는 네 자매 사이에서 가장 별나고 어쩐지 마이페이스지만 나머지 자매들이 다투거나 할 때는 분위기메이커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다. 진지할 땐 진지하게 고민하며 움직이는, 미워할 수 없는 셋째. 그리고 카호는 그 셋째 역할에 꼭 들어맞는다. 마치 제 위치를 잡은 직소 퍼즐 조각처럼.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거기다가 히로세 스즈. 이 무시무시한 라인업에서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매력과 분위기를 발산할 수 있는 배우. 그런 배우는 카호밖에 없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같은 경우 영화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원작을 이미 다 봤기 때문일까. 모르고 봤으면 더욱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카호는 인상적이었다. <블루 아워>에서의 ‘스나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카호는 어느새 일본의 국민 여동생 자리에서 벗어나 훌륭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정변이니 역변이니 같은 말에 사로잡혀 있던 내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든 변하기 마련인 것을.      


2020년 여름. 여전히 코로나는 유행 중이고 이젠 태풍까지 연달아 두 개가 발생하는 대혼란의 기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여름의 끝에서, 나는 다시 돛단배를 타고 카호의 필모그라피를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지긋지긋한 우울(Blue)의 시간(Hour)에서 잠시나마 도망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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