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한국에서 10월 3일은 개천절이자 모든 직장인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공휴일이지만, 미국 시간으로 10월 3일은 ‘민걸즈 데이Mean girl's day’이다. 무슨 뜻이냐고? 이걸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2004)에 대해 알아야 한다.
2004년 개봉한 이 영화는 청춘 코미디물로, 무려 16년 전의 풋풋한 린제이 로한과 레이첼 맥아담스,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만날 수 있다. 각본은 SNL에서 수석 작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코미디 배우로도 걸출한 활약을 선보인 티나 페이가 담당했다. 원제인 <민걸즈Mean Girls>는 우리말로 풀자면 ‘못된 여자애들(못돼먹은 계집애들?)’ 정도 될까? 하지만 한국 배급사는 이 제목이 애매하다 생각했는지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라는 괴상한 제목으로 로컬라이징을 해버렸다. ‘퀸카’와 ‘못된 여자애들’ 사이의 간극이라니. 유명 중국 드라마인 <후궁견환전>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옹정황제의 여인들>로 제목이 바뀌었던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맞먹는 최악의 로컬라이징이라 생각한다.
당시 유행하던 말로 제목을 지으면 안 된다는 예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포스터(…)
그런데 10월 3일이 ‘민걸즈 데이Mean girl's day’냐고? 그건 주인공인 ‘케이디 헤론’(린제이 로한 역)이 첫눈에 반한 ‘애런 새뮤얼스’(조나단 베넷 역)가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물었을 때 대답해주는 날이 “10월 3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하여 이 영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홍색 옷을 입고 <퀸카로 살아남는 법> 상영회를 여는 등의 활동으로 이 날을 기념한다. 분홍색 옷은 또 뭐냐고? 작중 ‘여왕벌’로 군림하는 ‘레지나 조지’(레이첼 맥아담스 역)가 “우린 수요일마다 분홍색 옷을 입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물론 ‘Jingle Bell Rock’ 동영상 클립을 봐주는 것도 잊지 말 것.
16년 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민걸즈 데이Mean girl's day’를 기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정말 이 제목 싫다!)은 사실적인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 서사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기 싫지만, 정말 싫지만 여초 사회에서 어느 정도 생활한 사람이 알아챌 수 있는 어떤 공기를 이 영화는 훌륭하게 체현하고 있다. 이 영화를 남성들과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작중에는 ‘레지나 조지’를 위시로 하여 ‘그레첸 와이너스’(레이시 샤버트 역)와 ‘카렌 스미스’(아만다 사이프리드 역) 셋이 만든 ‘번 북Burn Book’이라는 책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전교생의 사진과 함께 온갖 뒷소문과 험담이 적혀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이 영화의 감독.
자신이 ‘케이디’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지나’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온갖 쌍욕을 쓴 다음 자신의 사진을 붙인다. 이 ‘번 북Burn Book’의 소유자를 ‘케이디’로 몰기 위한 행동이다. 그런데 이걸 같이 본 남성들은 그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기 사진을 붙여?” 모든 남성이 그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만……. 굉장히 묘한 경험이었다.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정말 유토피아일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특히 나는 여중여고를 나왔고 여초 분야에서 일하고 있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유토피아는 아니다”란 사실을 명명백백히 보여주는 한편으로, 생각지도 못한 명쾌한 엔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음습하게 싸우다가 승패가 나뉘거나 자멸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케이디’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재니스’(리지 캐플란 역)와 ‘데미언’(다니엘 프랜지스 역)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레지나’는 운동부에 들어가 남아돌던 에너지를 발산하며 에이스가 된다.
이게 바로 여자 제작진이 만드는 ‘여적여’ 서사의 특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쾌한, 그러나 있을 법한 엔딩을 만든다. 끝이 찝찝하지 않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엔딩을 처음 봤을 때, 난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했던 <금발이 너무해>를 떠올렸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엘 우즈’는 전 남자친구의 현 여자친구(이후 전 여자친구가 되지만) ‘비비안’과 대학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가능할까? 가능할 수도 있다. 우린 더 ‘쿨’하게 구는 사람들도 많이 봐왔지 않은가?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니까.
여자들만 있는 세상이 유토피아는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여자들만 있는 세상이 지옥이란 것을 뜻하진 않는다. 개개인의 특성만이 있을 뿐, 결국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일을 겪는다. 세상만사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지니.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 아이들은 모두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사과하며 용서받는 시간을 가진다. 그 과정을 통해 신뢰관계를 재구축한다. 결국 모든 갈등의 해결점은 소통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관계든. 이게 바로 내가 <퀸카로 살아남는 방법>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