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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Sep 16. 2019

내 기억 속 그때 그 펭귄맨

영화 <배트맨 리턴즈>(1992)를 다시 보면서


내가 처음 본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 리턴즈>였다. 당시에는 이런 영화를 전부 더빙으로 방영해주었다. 어떤 성우가 누구의 역할을 맡았는지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리도 아니다. 그때의 나는 유치원조차 다니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배트맨 리턴즈>를 기억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당연히 이 영화가 너무 강렬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프레데터>나 <에일리언 4>나 <사탄의 인형 2>나 <나이트 메어> 등을 기억하는 것처럼.


어린 내게 가장 깊게 남았던 것은 역시 캣우먼이었다. 어쩐지 정신없고 넋이 나가 있는 듯한 어리바리한 비서가 죽은 뒤 다시 살아나서 섹시하고 강한 캣우먼이 되었다. 한동안 나는 캣우먼을 롤모델로 삼고 남동생을 비롯한 동네 남자애들을 줄넘기로 때리고 다녔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그때 팀 버튼이 만들었던 캣우먼은 지금 시각으로 보기에 비판받을 지점이 존재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처음 만난 여성 영웅이었다.


그리고 펭귄맨이 있었다. 원래는 '펭귄'이라지만 나는 역시 맨 처음 만났던 이름 '펭귄맨'이 더 익숙하다. 게다가 펭귄이라고 부르면 후반부에 나오는 진짜 펭귄들은 무어라고 부르나. 여기서는 실제 펭귄과 대니 드비토가 연기한 '펭귄'을 구별하기 위해서 펭귄맨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여하튼, 유치원생이 보기에도 펭귄맨은 어딘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불쌍한 빌런이었다. 날생선을 삼키고 인간의 코를 물어뜯고 색욕을 밝히는 모습을 볼 때는 너무 무서웠지만 이상하게 마지막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왜일까.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 <배트맨 리턴즈>가 들어왔다고 하기에 다시 봤다. 그런데 내 감상은 어릴 때의 그 마음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너무너무 싫었지만 마지막에 죽는 장면은 또 너무너무 쓸쓸했다. 펭귄맨의 생애가 약간 그 당시 장애인을 대하는 모습처럼 느껴져서였을까? 기형으로 태어났다고 유기된 어린 펭귄맨은 동물원의 펭귄들에게 길러지며 자연스레 '정상'의 범주에서 멀어지고 범죄의 길을 걷게 된다. 추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비정상'을 '개성'으로 표현해보기도 하고 슈렉 같은 대형 자본가에게 프로파간다용으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오스왈드 경으로 불리다가 그는 결국 "난 펭귄맨이야!" 하고 폭발한다. 근데 어릴 때와 달리 이 장면이…… 아주 인상깊었다.

그가 유기되지 않고 사회성을 기르며 교육받고 자랐으면 당연히 '오스왈드 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가식이고 허울처럼 느껴지는지 결국 본성의 모습, '펭귄맨'으로 돌아가버린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자기가 붙인 그 이름으로. 양복을 입고 외알안경을 낀 채 신사 흉내를 내다가도 날생선을 금방 집어삼키던 것처럼 그는 본성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펭귄맨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나는 사실 펭귄맨을 분석하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었다. 난 그냥 내 기억 속 다른 펭귄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펭귄맨을 생각할 때마다 짠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수도 있으니.


펭귄맨 첫 번째 기억. <배트맨 리턴즈>를 보고 난 후에,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뒤 모든 국민학교의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하고 드디어 우리 집에 소파가 생긴 후에, 홀로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인간 극장' 비슷한 류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본 적이 있다.

그 다큐멘터리에는 롯데월드였나 에버랜드였나, 여하간 놀이공원에서 댄서로 일하는 한 여성이 나왔다. 첫장면도 기억난다. 펭귄맨의 마스크를 보여주며 "귀엽지 않아요?"라는 식으로 말했다. "제가 쓰는 가면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징그럽다고 하는데 저는 너무 귀엽게 느껴져요"라고 했다.

그 놀이공원에서는 내부 공연이 있었다. 한창 <배트맨> 시리즈가 유행할 때라 <배트맨> 관련 공연이 한창이었고, 그녀가 맡은 역할이 펭귄맨이었다. 마른 체격이었던 그녀는 펭귄맨을 연기하기 위해 특수한 의상을 입고, 스위치를 누르면 끝에서 연막이 터지는 우산 소품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무냄새가 진동할 펭귄맨의 가면을 썼다. 그렇게 준비하는 시간이 거의 1시간가량 걸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녀가 맡은 펭귄맨은 빌런이다. 빌런은 히어로에게 퇴장당하는 것이 숙명. 1시간가량 분장했던 그녀는 무대에서 1분 정도 모습을 드러낸 뒤 허겁지겁 배트맨에게서 도망쳐서 내려온다. 카메라맨이 그녀에게 물었던 것 같다. 힘들지 않아요? 허무하지 않아요? 란 식으로. 그녀는 웃으면서 이게 제 역할인데요, 라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사실 화사한 메이크업을 하고 아리따운 의상을 차려입은 채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퍼레이드 댄서가 되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극단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리가. 그녀는 자조하며 퇴근하여 집에 들어갔다. 그녀에겐 아이가 있었다. 그것도 꽤 큰. 미혼모였다.  


어렸을 때 봤는데도 괜히 그 모습을 보면서 하, 힘들겠다, 싶었다. 아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나왔고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사실 그 내용이 전부 기억나진 않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프로그램 마지막에 후일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퍼레이드 댄서가 되어 활짝 웃으며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꿈을 이뤄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때문인지 이상하게 펭귄맨만 보면 기분이 짠해지는 걸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펭귄맨을 혼자 사랑하며 자신의 꿈을 위해 춤을 추는 그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펭귄맨 두 번째 기억. 학교에 다닐 적에 황정은의 「대니 드비토」를 읽었다. 소설집 『파씨의 입문』에서 읽은 것은 아니고, 무슨 문학상이나 작가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것 같다. 필사한 파일을 보니 작성한 날짜가 2011년 9월이고,  이 작품이 따로 실린 책을 찾아보니 『2009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 나온다. 분명치 않아도 「대니 드비토」를 맨 마지막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으로 읽은 게 맞는 듯하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좋은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유령의 이야기였다. 어떤 의미에서 제목은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기도 했고 조금이나마 연관이 있기도 했다. 약간 뭐라고 해야 할까.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중에 죽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소설의 도입부는 이렇다.


 펭귄맨이었던 배우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생각한 순간에 깨달았다.
 나는 죽고 만 것이었다.
 무덥고 맑은 오후였다. 잔, 잔, 잔, 잔, 하고 냉장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그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냉장고는 오로지 그 냉장고뿐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 죽은 입장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잔, 잔, 잔, 잔, 하고 냉장고가 돌아갔다. 그 소리에 자극을 받고 작은 소용돌이처럼 돌돌 말리며 천장으로 떠올랐다가, 흐르다가, 스테인리스 표면처럼 맑아졌고, 스푼처럼 오목해졌다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확고해졌다.
 어머, 하고 생각했다.
 나, 죽었어.
 냉장고 모터가 툭, 소리를 내며 멈췄다.(……)


나는 내가 죽으면  '유라'처럼 될 거라 생각했고 당시 만나던 애인은 내가 죽으면 '유도 씨'처럼 될 거라 생각했다. 하필 이때 나는 죽음에 굉장히 천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죽으면 애인에게 얼마든지 붙어 다니고, 애인은 갑자기 죽어서 사라진 뒤에 나의 이름을 입버릇처럼 부르면서 어떻게든 살다가, '미라 씨'라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럼 나는 '너무 오래 살아 있는 거 아니야'라는 기분이 되어 애인을 죽음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음산한 원령이 되어 곁에 남게 될 거라고. 하지만 애인은 '안'이라는 아이를 갖게 되고 조용히 나이들어갈 거라고. 그리고 나는 애인이 죽은 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죽고 난 다음엔 무엇으로도 남지 않고 말끔히 사라질 수 있기를 빌 거라고.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덧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자신의 생각처럼 되기를 빌 거라고. 그렇지만, 결국 무엇으로 남아버린 '유도 씨'처럼 애인도 무엇으로 남아서 나의 이름을 양지 바른 곳에서 부를 거라고.

그래서인지 나는 이 이야기가 깊게 남았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내 손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필사를 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좋아하는 이야기는 필사하여 남겼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펭귄맨을 연기했던 배우 이름인 '대니 드비토'는 그렇게 내 안에 자리매김했다. 펭귄맨을 볼 때마다 대니 드비토란 이름이 떠오르고, 그러면 당연히 이 작품의 내용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짠해졌다.


단지 펭귄맨의 마지막이 쓸쓸해서 짠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때 봤던 그 퍼레이드 댄서의 꿋꿋한 삶이 기억에 남아서 짠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으로 읽었던 황정은의 소설 내용이 하필 죽음이어서 짠할 수도 있다. 어쩌면 셋 중에 둘, 혹은 셋 중에 하나. 또는 셋 모두.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거창한 결말 따위는 없다. 그냥 언젠가 이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특히 내가 보았던 이름도 모르는 저 댄서 이야기는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펭귄맨을 봐도 짠해지지 않는 날이 올까, 잘은 모르겠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어머,

나,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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