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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Apr 28. 2020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쳤던 그대들에게

들어가는 이야기

<80년대&90년대 마법소녀 완구 북>('80s &'90s 魔女っ子おもちゃブック)이란 책을 교보문고에서 보고 말았다. 어머 이건 사야 해! 하며 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일본 원서였지만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떤가.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정말 정말 우울하거나 정말 정말 기쁜 날 뜯어보자고.

맞다. 나는 마법소녀물이 정말 정말 좋다. ‘마법소녀’라는 단어에 눈이 돌아가 그 자리에서 사버릴 정도로.



소녀라 지칭되는 연령대의 여자아이가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얻은 마법의 힘을 통해 변신하여 적과 싸우거나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애니메이션 장르, 마법소녀물.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마법소녀물이었다. 아니, 오히려 내 주변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드물지도.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여성인 그대! 놀랍게도 우리는 함께 마법소녀물의 황금기를 겪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려 <카드캡터 체리>, <요술천사 피치>,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전부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 당시에는 <천사소녀 네티>, <꼬마마법사 레미>, <마법기사 레이어스> 등 일본에서 방영 중이던 애니메이션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이라면 역시 <베리베리 뮤우뮤우>, <슈가 슈가 룬>, <캐릭캐릭 체인지>,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등과 함께 자랐을 것이고. 나보다 조금 더 연배가 있으신 분이라면 국내 애니메이션 <요정 핑크>로 시작해서 <요술공주 샐리>, <꽃천사 루루>, <요술공주 밍키>, <천사소녀 새롬이>, <샛별공주> 등을 보며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라면 역시 <빛의 전사 프리큐어>로 대표되는 프리큐어 시리즈를 포함하여 <치링치링 시크릿 쥬쥬>나 <소피 루비>를 보면서 크고 있을 테고.


그렇다. 우리는 좋건 싫건 마법소녀물에 많은 것을 빚지면서 자라났다. 그리고 우리는 이 추억의 마법소녀물을 아직까지 좋아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그럼 많은 패션 및 뷰티 브랜드들이 대표적인 마법소녀물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나 <요술천사 피치>, <카드캡터 체리> 등과 계속해서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수많은 컬래버레이션이 이루어지겠지.


그런데 말이다. 다들 이상하리만치 마법소녀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법소녀물을 좋아했다고, 또 지금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종종 봤지만 왜 좋아했는지, 그리고 그게 지금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가끔 외롭다.


물어보고 싶다. 혹시…… 창피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거냐고. 마법소녀물을 좋아했던 과거의 내가 창피한 것인지? 아니면 마법소녀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이를 먹은 나 자신이 창피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걸까? 과거에 좋아했던 마법소녀물을 지금 떠올려 보니 잘못된 성인지 감수성이나 젠더 의식에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일까? 음, 이건 이해할 수 있다. 나만 해도 뒤늦게 ‘앗, 왜 이런 부분이 있는 걸 몰랐지?’ ‘왜 그때는 이런 게 잘못되었다는 걸 몰랐지?’ 하고 왕왕 놀라곤 하니 말이다.


놀랍게도 마법소녀물은 대부분 남성들이 만들고 있다. 분명 여아 콘텐츠인데도!

지금은 유명 치킨 브랜드의 CM송으로 남아 있는 <요술공주 샐리>. 마법소녀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원작자는 요코야마 미츠테루다. 네, 맞습니다. 그 요코야마 미츠테루! 그 유명한 삼국지 만화를 그린 요코야마 미츠테루!

한국에 들어온 적은 없지만 <요술공주 샐리>를 이어 만들어진 마법소녀물 <신기한 메르모>와 마법소녀물이란 장르의 정체성을 정립한 <비밀의 앗코쨩>은 각각 데즈카 오사무와 아카츠카 후지오의 작품이고, 주제가가 매우 익숙한 <무지개요정 큐티 하니>의 경우 <겟타 로보>와 <마징가 Z>로 유명한 나가이 고가 대놓고 남성 층을 노리고 만든 작품이다.

근래에 만들어진 작품 중에서는 <리리카 SOS>가 그러하다. 무려 일본의 아이돌 그룹 AKB48 총괄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각본을 담당했다. 그 외에도 온갖 다양한 마법소녀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남성들의 손을 거쳐 제작되고 있다.


옛날 작품들이야 시대적 한계라는 단어로 얼버무릴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그게 면죄부를 주진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도 그런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아 콘텐츠에 대한 이해 부족, 가부장적 사고관이 극심한 일본 사회 특유의 분위기로 인한 여성 스탭진의 부재, 그 사이에 공고해진 남성들만의 암묵적인 연대 또한 일조를 했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장 오랫동안 방영되고 있는 마법소녀물 <프리큐어> 시리즈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첫 시리즈가 시작되어 2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프리큐어> 시리즈는 ‘여아들을 위한 콘텐츠’라는 점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법소녀물의 본래 의도이기도 하다.

일명 ‘프리큐어의 창조자’라 불리는 초기 프로듀서 와시오 타카시는 “프리큐어는 여아들을 위한 콘텐츠”라는 부분을 공고히 했다. “여자아이가 주연으로서, 어쨌든 스스로 돌파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던 와시오 프로듀서의 의도는 시리즈가 16년 동안 이어지는 과정에서 단 한번도 침해받은 적이 없었다.

주요 컨셉으로 ‘육아’를 내세웠던 2018년 작품 <허긋토! 프리큐어>의 경우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성 평등’ 관련으로 아주 좋은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되었고, 내외적으로 고평가를 받았다. 역사가 깊은 만큼 항상 시대적 흐름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왜냐, 다들 나이를 먹으면 마법소녀물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히 머리가 굵어지면 졸업해야 하는 ‘유치한 것’으로 취급한다. 근데 나는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왜? 대체 왜? 아이들이 보는 거라서? 그럼 디즈니나 지브리 애니메이션도 보면 안 되는데. 왜 그건 되고 이건 안 돼?


이것도 일종의 여성 혐오이지 않을까. 여성이 주가 되는 콘텐츠는 하위 콘텐츠고, 질이 낮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 남아 콘텐츠를 그렇게 다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괴수물이나 ‘점프 3대 만화’로 대표되는 소년만화처럼 남아용 콘텐츠들은 다들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며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낸다. 어쨌거나 어른을 위한 콘텐츠라는 건 마찬가지인데, 남아 콘텐츠를 두고선 다들 영향을 받았다고, 그런 걸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반해 마법소녀물은 어른이 좋아하면 부끄러운 것이 된다. 나이 먹으면 자연스레 졸업해야 하는 것이 된다. 아직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공개 석상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거기다 남성들은 마법소녀물을 보지 않는다. 왜냐? 주인공이 여성이니까! 마법소녀물이 아니더라도 남성들은 장르 불문 주인공이 여성이면 그냥 안 본다! 나도 처음엔 에이 설마, 싶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남성 직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작은 아씨들』이나 『세라 이야기』를 보지 않아서 내용을 하나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이입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아님 여자 주인공인 작품들은 자기네가 주요 독자층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하는 걸까? 아니면 여자애들이 보는 걸 남애가 보면 창피하니까? 나는 남성이 아니라 모르겠네.


그런가 하면 어린 여자애를 암묵적인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 마법소녀물을 보는 남성들도 있다……. 놀랍게도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으며, 한국 웹사이트에서 쉽게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답니다. 무슨 다크웹 같은 데 숨어 있지 않고 접속자 수 TOP10에 들어가는 사이트에서도 이런 이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답니다!

마법소녀물 이야기가 터부시되면 터부시될수록 안타깝게도 이런 이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가 더 힘을 얻게 된다. 마법소녀물에 대해 감상을 나누고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은 그런 곳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려 해도 어쨌거나 이런 이들이 선별적으로 가져온 정보에 기대어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그래서 나는 마법소녀물 이야기를 양지로 끌어내려 한다. 숨길 만한 것이 아닌데도 숨겨져 있는 마법소녀물을, 이런 이들의 손에서 뺏어 오고 싶다. 여자아이들의 것을 여자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양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전한 토양을 만들어주고 싶다.


오히려 나는 마법소녀물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된 게 아닐까 하고, 요새 들어 생각한다. 마법소녀물을 보면서 한때나마 무한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모험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지구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힘을, 마법소녀물을 보며 얻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에 감사할 때가 있다. 좋은 여성 콘텐츠를 봤을 때다. 이래저래 여자로 사는 데 부침이 많은 사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미래 세대를 위한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 <캡틴 마블>을 보면서 느꼈던 그런 기분을, 나는 가끔 <프리큐어> 시리즈의 전투신을 모아둔 유튜브 영상을 보며 느낀다. 그럴 때마다 감사하다. 아아, 내가 여자로 태어났기에 마법소녀물의 굉장함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거구나, 하고.


마법소녀물을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왜 안 봐요? 이렇게 좋은데. 뭐가 부끄러워요? 오히려 요즘은 퀄리티도 더 좋아졌는데. 나는 마법소녀물을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요즘 나오는 <프리큐어> 시리즈의 변신씬이나 격투씬 영상을 보면 알게 된다. 마법소녀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장르라는 사실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성들을 이어줄 한 줄기의 끈이라는 사실을. 이미 과거의 사람인 우리는 이걸 보며 마법소녀물에 열광했던 그때로 돌아가지만, 이런 걸 보고 있을 아이들은 틀림없이 멋진 미래를 그리는 사람으로 자라나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 과거의 사람은 흐뭇해진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나요? 변신씬과 격투씬만큼 마법소녀물 영업에 효과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빨리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고 영업당하여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었으면 좋겠다. 이상 마법소녀물을 외롭게 좋아하는 사람의 어두운 속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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