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천사 루루>
언젠가는 내가 사는 우리 마을에도
꽃의 천사 루루가 나타나겠지
내가 기억하는 마법소녀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꽃천사 루루>의 주제가에 나오는 가사다.
이 말대로 언젠가는 내가 사는 우리 마을에 꽃의 천사 루루가 나타날 줄 알았다. 매일 밤마다 꽃천사 루루가 우리 동네에 와주기를 빌며 잠들었을 정도였다. 실제 루루를 만나는 꿈도 몇 번이나 꾸었던 것 같다. 무얼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꽃천사 루루>의 원제는 <꽃의 아이 룬룬花の子ルンルン>이다. 1979년에 방영을 시작한 꽤 오래된 작품으로서, 일본에서는 마법소녀물의 효시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1980년 MBC에서 한 번, 1994년 KBS에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방영되었다. 내가 본 것은 1994년 KBS 버전. 무려 16년이 지난 뒤에야 <꽃천사 루루>를 본 셈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루루는 ‘꽃의 아이’로서 꽃의 정령들이 살고 있는 별을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무지개꽃을 찾는 임무를 받았다. 무지개꽃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돕는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다니던 루루는 내가 사는 동네에 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왜냐하면 루루는 유럽 마을을 중심으로 모험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에 방영된 <꽃천사 루루>는 저 유명한 <캔디 캔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국은 유럽이 아니었기에 그는 결국 내가 사는 부천에 올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이 경우 <꽃천사 루루>는 픽션이다, 라든가 2차원과 3차원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반론은 받지 않기로 하겠다.
<꽃천사 루루>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애니메이션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내심 루루 특유의 곱슬머리와 빨간색 긴 부츠를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꽃천사 루루>는 1979년 작품이었고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본 건 1995년이었으니까. <캔디 캔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걸 보니 루루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표현도 <캔디 캔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문득 내가 언제부터 <꽃천사 루루>를 잊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한국에서는 1994년 10월부터 1995년 2월까지 방영되었다고 한다. 흐음. 그럼 1995년에는 무슨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던 거지, 하고 살펴봤더니 엄청난 결과가 나왔다. 내가 정말 정말 좋아했던 <뾰로롱 꼬마마녀>를 시작으로 <세느강의 별>과 <꽃의 천사 메리벨>, <돌고래 요정 티코>, <사우르스 팡팡>, <우주선장 율리시즈>, 국산 만화영화 <꼬비 꼬비> 등……. 나도 몰랐는데, 내가 아마 한국 애니메이션의 황금기를 살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대단한 애니메이션이 쏟아졌으니 1979년도 작품은 잊을 만 했네, 싶어졌다.
오랜만에 <꽃천사 루루> 오프닝을 보고 싶어져서 유튜브에 검색해봤다. ‘꽃천사 루루’까지만 쳐도 뒤에 ‘1994’가 자동으로 완성된다. 자동으로 완성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검색했던 걸까? 재생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꽃을 사랑하는 예쁜 소녀 루루
아름다운 꽃의 나라 천사가 되어
행복을 준다는 몰래 피어 있는
신비의 무지개꽃을 찾아다닌다
루루루- 루루루-
세상 모든 꽃들이 루루의 친구야
언젠가는 내가 사는 우리 마을에도
꽃의 천사 루루가 나타나겠지
꽃의 천사 루루가 나타나겠지
근데 참 이상하지.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목이 자꾸만 메어 왔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쿵쾅 뛰었다. ‘루루루- 루루루-’ 하는 후렴구 부분에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랜만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각은.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노랫말이 참 다정했다. 그래, 진짜로 꽃의 천사 루루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영상에는 49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이 ‘우리 동네에도 루루가 올 줄 알았음ㅠㅠ’이었다. 우와, 이 만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네, 싶었다. 어쩐지 신기했다. 어릴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꽃천사 루루>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된 애니메이션은 나만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래봤자 49명밖에 없지만.
누군가 <꽃천사 루루>의 엔딩에 대해 달아둔 댓글도 있다. 나도 엔딩은 보았다. 루루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무지개꽃은 알고 보니 루루의 집에 피어 있었다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의 결말을 연상케 하는 결말이었다.
루루가 달고 다니던 꽃 브로치가 탐났다던 댓글을 단 이도 있었다. 물론 나도 탐났다. 그 꽃 브로치는 예쁘기도 예뻤지만, 특히 미치게(?) 만들었던 부분은 후반부쯤 갔을 때 모습이 바뀌었다는 거다. 변하기 전 모습도 예뻤지만 변한 후 모습도 예뻤다. 알고 보니 ‘마법소녀의 완구가 각성하여 변한다’라는 설정 자체가 <꽃천사 루루>에서 처음 등장한 거라고 한다. 그럼 갖고 싶었던 게 당연하네, 싶었다. 나 또한 <꽃천사 루루>로 그런 설정을 처음 접했으니까.
한국과는 다르게 일본에서 <꽃천사 루루>는 큰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것저것 검색해봤는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히트를 치면서 원제인 <꽃의 아이 룬룬花の子ルンルン>에서 따온 ‘룬룬ルンルン’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약간 들뜨고 즐거운 기분이나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라나. 작가 하야시 마리코가 1982년에 《룬룬을 사서 집에 돌아가자ルンルンを買っておうちに帰ろう》(한국에서는 《내숭을 떨까 수다를 떨까》라는 제목으로 발간)는 책을 낸 이후로 젊은 여성들 사이에 대유행하여 지금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는데, 좀 더 찾아보니 정말 이 단어의 어원이 <꽃천사 루루>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근데 뭐 아무렴 어때. 난 일본 사람도 아니고, 설령 일본 사람이라 해도 ‘룬룬’의 어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따위에 큰 관심은 없다. 언어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꽃천사 루루> 설을 반대하는 사람이 내놓는 의견도 다른 애니메이션 주제가에서 시작된 것이다! 운운이라 그다지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꽃천사 루루>를 통해 룬룬이란 단어를 배웠다는 것뿐.
역시 나도 기분이 룬룬! 되는 것일까. 가끔 유튜브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마법소녀물의 오프닝이나 변신씬 등을 찾아보면 기분이 한없이 둥둥 떠오른다. 평소보다 들뜬 기분이 되어 아무나 붙잡고 이 작품이 얼마나 굉장한지, 지금 이 장면이 왜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해 떠들고 싶어진다. 그럴 땐 트위터에 미친 듯이 트윗을 쏟아붓는다. 다다다다다. 음, 얘기하다 보니까 이건 확실히 ‘룬룬’이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래, 나는 마법소녀물을 볼 때마다 기분이 룬룬하다. 그게 과거 추억이 묻어 있는 작품이든, 아니면 지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작품이든.
기분이 룬룬해지니까 마법소녀물을 보는 것일까? 아님 마법소녀물을 봐서 기분이 룬룬해지는 것일까? 언뜻 말장난 같지만 꽤 중요한 차이다. 행복해지니까 웃는 것이냐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것이냐. 감정이 먼저 움직이고 행위가 그에 뒤따르는 것이냐 아니면 행위가 있기 때문에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냐. 어려운 문제다. 뭐, 찾아보니 행위가 먼저라는 것 같다……. 진짜인가? 괜히 의심스러운 나. 잘 모르겠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꽃천사 루루>를 봤을 때의 나는 룬룬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야 다시 기억해낸 <꽃천사 루루>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