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일지Day4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1. 적은 짐. 2. 이른 시간. 3. 딸기 주스에 신경 팔리지 않고 커피 마시기. 4. 뒤꿈치 까진 것에 붕대. 3안은 너무 단 커피를 사서 망했다. 이집에서는 아메리카노만 먹는 걸로. 9시가 되기 전에 도착해 4번 방에서 어제 한 것을 복습했다. 부직포-힘받이-도수초배깢지 순순히 잘 했다. 문제는 아직 A면의 어느 부분부터 칼질을 하는지 아직 헷갈린다는 점. 그 다음 운용지. 운용지는 길게 접어 칼등을 대고, 그대로 자른다. 운용지로 960㎜ 중앙과 그 기준으로 다시 960㎜ 둘을 표시하고 그곳을 기준으로 중앙 삼아 운용지를 붙인다. 위에서 붙이고, 아래에서 붙일 때 50㎜ 의 여유를 둔다. C면에서는 960㎜ (이제껏 B면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B면에서는 1,060㎜ 을 기준. 창문 안에는 붙이지 않기.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공 간 초 배
천장에 붙이는 것으로 일단 황초배지를 절반으로 15장 접은 뒤, 15장씩 두 개를 도배칼로 살살 펴서 10㎜ 의 여유를 두고 펼쳐지게 한다. 거기에서 다시 여백이 남은 삼각형 모양으로 접고, 다 접으면 절반으로 접어서 양쪽 면(여백) 풀칠, 그리고 뒤집어서 마찬가지로 풀칠. 그 다음 천장 쪽으로 퐉! 하고 붙여 놓는다. 공간초배를 할 때에는 앞줄에는 6장. 그리고 옆으로는 5장씩 가는데, 양측 모두 여백을 50㎜ 으로 둔다. 총 30장으로 천장을 메우는 것이므로, 종이가 남으면 아무데나 붙여도 된다. 나는 격자 구성에 약해서 역시 처음 번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풀이 빠르게 마르기 때문에(도수초배는 특히 묽은 풀을 사용해서 더 쉽게 마른다) 속도를 빨리 해야 한다. 공간초배도 된풀을 사용하지만 된풀 또한 빨리 마르기 때문에 리듬감 있게 붙여야 하고, 천장은 내 키로는 닿지 않기 때문에 우마를 쓰는데 우마를 쓸 때 늘 그렇듯, 한 번에 일처리를 해야 한다. 아무튼 이 초배를 완성하면서(어제는 공간초배를 시간이 없어 못했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래도 한 번 요령을 익히니 훨씬 수월했다. 9시부터 1시까지 작업했으니 굉장히 느린 속도이지만 완성했다는 즐거움이 다른 감각을 막았다.
1시까지 진탕 일하고 나니 오히려 식욕이 없어서 컵누들과 닭죽으로 때웠다. 어제 싸놓은 야채는 내일 먹든가 해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8시에 도착해서 9시 반 수업시간이 되기 전에 초배를 마무리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아침에 졸았기 때문에 오늘 약국에서 붕대를 사면서 비타민제를 사먹었던 일을 모두 마치고도 기운이 많이 남았다. 작업에 쓸만한 것들이 있을지 둘러보고 운용지에 새 그림도 그려 보았다. 도중에는 초배 순서와 주의할 점을 작성해서 노트를 만들었다. 짐을 많이 들고 오지 않은 것은 장점이지만, 필기나 그림을 그릴 노트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것은 좀 웃겼다. 어제 얼마나 지쳤는지, 다음날은 글씨 쓸 힘도 나지 않았을 거라고 지레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러니까 A벽과 C벽을 한 셈인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좌우가 AB였던 게 아닌가? 장폭이 어디였나? 하면서 나름의 혼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두 지나갈 혼란이다. 벽의 치수를 외우고, 아니 외우는 게 아니라 익고 이물어서 기억하는 것이고, 풀의 농도를 체크하고, 우마에 오른 자세를 감각하고 기억하는 일 모두 도움이 된다. 어디에? 정신병에. 그래서 오늘은 병원에 가서 쎄로켈을 줄이려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기도 하며, 최근 수면 문제로 탈을 일으킨 적이 점점 줄어서 그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약물이 상당히 고용량인데, 조증이나 일 벌임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7시간을 넘게 도배 일에 집중하게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간간이 쓰는 글과 작업들, 업무와 메일, 강연 요청 등을 처리하고 있노라면 내가 즐거워 마지않는 유익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쁘다.
어제를 고점으로 체력이 한 단계 상승했다. 뒷꿈치를 다친 문제도 해결해서 걸음도 퍽 자유롭다. 사람들과는 아직 스몰의 스몰 토크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물어보고 답하기 정도는 서로 한다. 당음료는 탈진의 임계점이 넘을 때 제일 강렬한 욕구여서, 차라리 오전에 모든 일을 몰아하고 헉헉거리는 것이 그를 멀리하는 좋은 기법이다. 흡연은 절반으로 줄였다. 아예 만끽의 기분을 주지 않는 흡연 횟수는 셈에서 제외해버렸다.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위태롭다는 느낌도, 불안한 기분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그렇다. 대보름 이후 나는 조증의 기세에 오르고 있다. 지금이 그나마 폭이 약소하게 오른 것이다) 그럴 수록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과 말과 행위로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까. 의외로 말수가 적다. 청소에 열심히 참여한다. 다른 사람의 작업 과정을 관찰한다. 3일이 지났으니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마음껏 연습하고 마음껏 망칠 수 있다.
초배작업과 풀 사용(6~7개의 배분)을 가장 횽율적으로 하는 동선을 뽑아야 한다. 자신의 시뮬레이션에 맞춰. 그리고 그동안 공간 사용도 극한의 효율을 사용해야 한다. 초배 재단한 것을 )자기만 아는) 먼 공간에 숨겨 두는 것, 이는 장폭과 실크도 해당된다. 풀을 바르고 나서 공간초배를 시작할 때 깔지 절반을 가는 것 등. 사소한 디테일 하나가 시간이고, 시간이 쌓일 수록 이득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간의 동선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어디에 우마를 놓을지, 어느 방향으로 이동시킬지, 힘받이를 좌우로 먼저 칠해야 하는지 앞 뒤로 먼저 해야하는지 같은 것들. 사소한 것들이 연결되지 않으면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작은 알레고리를 하나하나 적어가며 외우는 것이다.
내일은 장폭과 실크를 다룬다고 한다. 그것까지 배우면 실지로 작업과정을 한 바퀴 도는 셈이다. 이후 2주동안은 그 작업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2시간으로 끊는 나날이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반복 작업을 좋아한다. 항상 새로워야만 흥미를 느끼진 않는다. 사람이 즐거움, 재미, 혹은 무언가 가치를 찾아내는 과정은 제각각일 테지만, 새 일이라고 무조건 쌍수들고 환영하지 않으며(나는 종종 몹시 보수적인 태도를 가질 때가 있다) 늘 하던 일이라고 지루해지거나 흥미가 줄어들지도 않는다. 다만 돌아가는 매커니즘이 같은 원을 그리더라도 좀 더 동그랗게 아니 좀 더 네모낳게(그러면 네모가 되지만) 아니면 마구잡이로 그리려고 하는 것을 다시 동그랗게 잡는 일도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