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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너울 Apr 10. 2023

이 방향이 맞나요?

답은 아마 나중에

내가 사는 A시는 신경정신과가 많지 않다. 이럴 때는 서울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옆 동네인 B시의 신경정신과까지 검색했다. A시에서 갈만한 병원을 추린 후 이번에도 잘 맞지 않는다면 B시로 활동반경을 넓혀 보기로 했다. 약을 먹는 기간이 일주일에서 이주일로 변한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므로 B시까지 가는 교통이 불편하지만 2-3주에 한 번이라면 가볼 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맞는 정신과 찾는 일이 내 안색에 맞는 목도리를 걸쳐 고르는 것처럼 단순하고 부담 없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선생님과의 면담 스타일이 잘 맞는지, 내가 안심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지 알려면 시간과 감정이 들고 이 약이 내게 잘 맞는지 보려면 직접 몸과 마음, 기분으로 겪어봐야 한다. 이미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안 아팠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적절한 치료법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그래도 가끔 대놓고 물어보고 싶다. 이 병원이 맞나요? 이렇게 가면 되나요? 이 방향이 맞나요?


아마도 들리는 것이라면 내 질문만 허공에 메아리치고 한참 뒤에야 내 경험 속에서 돌아올 답들일 테지만. 



세 번째 신경정신과는 A시에서 내가 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곳이었다. 이 병원은 지금까지 간 두 곳의 신경정신과와 다른 점이 여럿 있었다. 


첫 번째로 의사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있는 곳이었고, 두 번째로 가자마자 태블릿 pc를 주며 여러 가지 검사를 시켰다. 내가 갔던 첫 번째 병원에서는 원장선생님과 면담 후에 검사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고, 첫 면담 후 별도의 검사가 없었다. 두 번째로 갔던 병원에서는 두 번째 내원일에 프린트된 종이로 간단한 검사를 했다. 검사비는 거의 들지 않았다. (이때 나는 점수로만 보면 경도 우울증에 해당했다.)


여기서는 더 많은 검사를 했고, 각 검사 당 질문 개수도 더 많았다. 최대한 고민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려고 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체크했다. 그다음에는 몸에 무슨 기계의 센서를 접촉한 후 수면 관련 검사를 했다. 수면 중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었나, 수면의 질을 체크하는 것이었나 벌써 몇 주가 지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후자의 검사 결과는 문제없다고 나와서 안심했다. 


검사를 마친 후 잠시 더 대기하다가 마침내 진료실로 들어갔다. 새로 만난 의사 선생님은 지난 두 병원의 원장선생님보다 나이대가 젊었다. 지금까지 만난 의사 선생님들이 장년층이었다면 이분은 중년의 초입에 들어선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이 병원에 오게 된 이유-첫 번째 신경정신과의 갑작스러운 폐업-에 대해 말했고 내 우울증 내력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대학교 심리상담센터에서 두 명의 상담자와 상담을 했었고, 정신과 약은 언제부터 먹게 되었으며 초반에 내 우울증은 어떤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증상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내 우울의 원인은 실패한 대학원 생활과 그 힘든 시기 내 마음이 믿었던 가족에게 잘 수용되지 않았던 점에 있다던가, 아니 사실은 중학교 때부터 우울감과 압박감을 느껴 우울의 뿌리는 더 오래 되었다는 말도 했다. 가족 중에서는 누구에게 제일 의지하는지, 누구와 제일 마찰이 있는지 물어서 그에 대한 답도 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가 아까 한 검사 결과를 모니터에 띄워 보여줬다. 자살사고가 있던 초기에 비하면 우울증이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확인받았다. 


면담 중 들은, 기억에 남는 말들은 


"분노가 좀 있네요."

"죽고 싶으셨군요."

"많이 나아지셨네요."


나도 느끼던 것들이어서 마음 편히 수긍할 수 있다는 것에 다행스러웠다. 상담 때도 그렇고 내게 필요하지만 수긍하기 힘든 말을 듣고 내게 부과된 치료(혹은 진단) 시간이 끝날 때면 한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아졌다는 내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점에 안도했다. 


두 번째 병원에서 약을 증량한 후 너무 나른하다는 것과 정신과 약을 복용한 기간 동안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심리적으로 힘들다는 정보도 전했다. 대기실에서 했던 검사 중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매력도에 관한 질문도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요즘 스스로 매력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전에도 마른 체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몸에서 마음에 드는 구석이나 몸 선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구석도 없다고 느낀다. 그만큼 마음이 괴롭다. 간 수치가 올라가는 등 건강이 안 좋아진 것도 나의 자존감과 안정감을 낮추는 데 한몫한다. 여기서 더 살이 찌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의사 선생님에게 제발 살 안 찌는 약을 처방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선 새 의사 선생님은 첫 번째 병원에서 먹던 양과 종류로 약 처방을 되돌렸고 2주 동안 경과를 보자고 했다. 약의 양이 줄었다는 데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두 번째 병원에서의 처방은 약이 늘어나며 생긴 나른함과 졸림도 문제인데 나 자신의 효능감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더 큰 문제 같았다. 물론 전문가가 처방한 약이지만... 그래도 먹는 사람에게 납득이 가도록 설명을 자세히 해주거나, 언제까지 먹어보고 경과를 보자는 언급이라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수긍하지 못한 채로 속상한 마음으로 약을 꼬박꼬박 먹으려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믿지 못한 채로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건 참 사람 지치는 일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다고 말을 하고 선생님의 눈을 응시했는데 '결국은 너울 씨의 선택이에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맞는 말이어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삶의 방향을 알지 못한 채 흘러가는 조각배고 이 작은 선체를 덜 흔들리게 하기 위해 무게 추를 맞춰보려 여기에 왔지만, 신경정신과에서 도와줄 수 있는 건 올바른 진단과 처방으로 일상의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지 방향키를 대신 맞춰주는 게 아니니까. 



기다린 것에 비해 짤막한 면담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한 번 면담한 것이라 이 선생님과 내가 잘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번 선생님은 내가 지금껏 만난 신경정신과 선생님 중 가장 사무적인 스타일이 아니었나 한다. 이 스타일과 내가 잘 맞는지는 아마 몇 차례 더 면담하고 약을 먹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면담을 끝내고 나오는 길, 검사 종류가 많더라니 검사비를 합친 초진비가 5만 원이 넘어가며 만만치 않았다. 카운터에서 처음이라 그렇고 다음부터는 이만큼 비싸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아빠 카드로 결제를 했다. 아빠에게 한 번에 5만원 넘는 결제 문자가 갈 걸 생각하니 미안하고 민망해졌다. 이걸 내 돈으로 걱정 없이 지불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어찌 됐든 아직 가족의 보호 아래 있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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